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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강원도 양양지역 3 · 1운동의 전개 27 1919년 4월 초 일어난 양양군의 3·1 독립운동은 규모와 내용 면에서 강원 도에서 가장 격렬했으며, 전국적으로 도 손꼽히는 대중적 독립운동이었다.  양양 3·1독립운동은 최대 집결 인원  4,000여 명, 연인원 1만 5,000여 명  이상이 참가했는데, 사망 11명, 부상  50여 명, 체포 170여 명의 피해를 냈 다. 일제 경찰은 체포된 이들에게 혹 독한 고문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순 국한 함홍기의 관을 파괴하고 김학구 의 시신을 다시 파헤쳐 훼손하는 등  반인륜적인 악행을 저질렀다. 양양의  3·1독립운동은 전 계층이 하나 되어  일제당국에 큰 충격을 준 강원도 최 대 규모의 항쟁이었다. 민중들이 흘 린 피와 눈물은 오늘날 양양의 산천  곳곳에 이름 없는 고개와 기록으로  남아 그날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강원 지역에서 3·1독립운동이 가장 격렬하였던 양양 양양군의 3·1독립운동은 규모와 내용 면에서 강원도 내에서 가장 격 렬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대중적 독립운동이었다. 1919년 2월 고종(광무황제)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손양면의 양반과 유생들은 이를 기괴하게 여겼으며, 관청의 명령과 상관없이 복상(服喪)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특히 양양에 거주하던 전주 이 씨 문중은 고종의 서거를 깊이 비탄했다. 이들은 과거 이토 히로부미[伊 藤博文]가 사망했을 때 관청이 한국인들에게 추도회 거행을 강요했던 것과 달리, 고종의 서거에는 아무런 조처가 없는 것에 대해 크게 분격 했다. 양양의 만세 시위 계획은 3월 말, 유교계와 기독교계 지도자들에 의해 양분되어 추진되었다. 유교계, 기독교계, 학생들이 활발히 참여 먼저, 유교계의 움직임은 고종의 국장에 참례한 뒤 독립선언서를 숨 겨온 이석범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쌍천학교를 경영하던 도천면 중 도문리 자택에서 아들 이능렬을 앞세우고, 도천면의 김영경, 강현면의 장세환 등 쌍천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시위를 준비했다. 이후 그는 함평 이씨의 집성촌인 양양면 임천리 이교완의 집으로 본거지를 옮겨 청·장 년들을 우선적으로 포섭했다. 또한 양양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인 최인 식과 그의 처남 김명기 등을 통해 조직을 확대했으며, 양양보통학교 졸 양양군 임천리 만세운동의 본거지였던 이교완의 집터(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