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page
Special Theme • 명성황후, 그는 누구인가? 27 의 동의와 허락, 암묵적 동조 하 에 제한적으로 행 해지는 구조였다. 황후의 국정 개입 은 친정 식구들인 민씨일족의 번영 의 길이요, 운명 공동체인 고종 정 권의 안정을 위한 길이기도 하였다. 일본, 황후를 표적으로 삼다 황후와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놓고 서로 갈등 관계 에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임오군란 당시 대원군이 군란의 여파로 장호원에 피신해있는 중궁 전의 생사도 모르는 채 강제로 중전의 국상을 선포 한 일, 정씨 성을 가진 소경이 황후의 사주를 받고 나 무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대원군을 저주하다가 체포 되어 처형당한 일이 공공연하게 회자 되었다. 대원 군과 황후 양측이 권력을 사이에 두고 알력을 빚은 사실은 황후가 민영소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편지에는 대원군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 경 계심 등의 부정적인 정서가 많이 표출되고 있다. 대 원군을 호명하는 단어도 ‘이모(李某)’, ‘이군부(李君 父)’라고 지칭하면서 직접적인 호칭을 가급적 생략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임오군란 후 청나라에 연금되었던 대원군이 환국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황후는 대원군 측의 움직임 과 정보를 캐고, 그의 동정을 엿보려고 촉각을 곤두 세웠다. 황후가 대원군 측의 동향을 지속적으로 살 핀 것은 정치지형의 변화를 신속하게 파악하여 또다 시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원군은 고 종을 대리하여 섭정하던 10년의 기간 외에도 임오군 란 당시 33일간, 갑오개혁 당시 4개월간 고종과 명 성황후를 대리하는 정치적 맞수로서 정치 일선에 나 섰기 때문에 늘 갈등이 있었다. 일본은 대원군과 황후의 질시 반목하는 정치적 분 위기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였다. 갑오개혁 당시 일 본은 조선 조정에 친일 관료를 심고 훈련대를 설치 하며 왕실과 정부를 분리하였다. 개혁의 이름으로 왕실이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자 조정에서는 곧 반격을 시작하였다. 즉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통해 러시아의 도움을 모색했으며, 박정양·이완용·이범진 등의 친러파를 등용하였다. 조선 조정의 이러한 움 직임은 삼국간섭 이후 일본 세력의 쇠퇴를 감지하고 있는 일본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박영효 등의 친일 개화파를 통해 조선 침략의 발 판을 마련하려던 일본 측으로서는 국왕 내외의 친러 정책에 위기감과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강경한 방법으로 친러정책에 제동을 건 후 일본은 상황을 호도하기 위해 황후를 부정부패의 원흉이자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몰아갔다. 특히 일본인이 발 행한 우익성향의 『한성신보(漢城新報)』에서는 국정 혼란의 주범인 황후가 국왕의 총명을 흐리게 하며, 관직을 매매하는 등 탐학한 행위를 한 것으로 몰아 갔다. 민씨일족의 부패 탐학과 더불어 황후가 무속 에 빠져 국왕을 현혹하고 국가재정을 낭비했다는 식 의 과장된 보도도 서슴지 않았다. 나아가 황후의 사 교(邪敎) 행위를 뒷받침해 준 무녀, 진령군(眞靈君)과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 다가 갑오개혁기 내무대신직을 맡 으며 화려하게 복권된 박영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