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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평안도 지역 3 · 1운동의 전개와 양상 27 평양에서 신홍식을 만나 서울에서 결정된 운동방법 과 거사일이 3월 1일 오후 2시라는 것을 듣고, 26일 진남포에 돌아와 노윤길의 집에서 동지들과 함께 담 당할 일을 나누어 맡았다. 28일에는 노윤길을 독립 선언서를 받아오도록 평양에 보냈더니 3월 1일 첫 열차로 선언서 500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으로 는 부족하다고 느껴 그날 오전 중 삼숭학교 교사 조 두식(趙斗植)에게 선언서를 발췌하여 1천장을 등사 판으로 찍고, 태극기도 등사하여 300개를 만들게 하 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삼숭학교 남학생 100여 명, 여 학생 50여 명을 포함한 500여 명이 신흥리감리교회 당에 모여 고종 추도회를 갖고, 그 자리에서 홍기황 이 독립선언서에 기재된 내용을 설명하고, “찬성하 는 사람은 나와 함께 지금부터 시내를 「조선독 립만 세」라고 크게 외치면서 행진하자”고 연설하자 모두 가 만세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선언서는 오후 2시경 교회 종소리에 맞추어 시내 곳곳에서 반포하기로 미 리 약속되어 있었다. 무명베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태극기 두개를 앞세우고 600여 명의 시위대 가 진남포경찰서 앞으로 몰려가자 경찰들이 출동하 여 해산을 강요하였으나, 듣지 않자 홍기황 등 주동 자들을 검거하였다. 안주에서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읍내교회 평양 숭실학교 교사  3·1운동 당시 숭실학교 교정에 게양됐던 태극기(숭실대학교 한국 기독교박물관 소장)     평양 3·1운동에 참여했던 숭실학교 밴드부의 순 회음악연주회 팸플릿 뒷면(연도 미상, 네이버 지 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