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page
27page
애국지사 송재 한양조공 휘 병채 묘비문
공의 휘는 병채이며 자는 천보요 호는 송재니 본관은 한양이다. 시조 고려 조순대부(朝順大夫)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 지수(之壽)의 24세손으로 서기 1878년 8월 13일에 청양군 청남면 왕율리에서 엄친 조학원 선생과 자친(慈親) 문화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은 성년이 되자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지모가 남달리 뛰어나 인근 주민으로부터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칭송을 받아왔다. 1905년 일제의 총검 아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국권이 박탈 당하자 나라는 빈사지경(瀕死地境)에 이르렀고 백성들은 나라 잃은 슲음으로 분노하여 울분의 함성이 지축을 흔들자 공은 적개심이 불타 항일 구국운동에 앞장 설 것을 결심하고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였고 동지 김영진 외 8명과 협약하여 상해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밀통하고 만주 길림을 왕래하며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군자금 조달 및 군기 매입 임무를 부여받고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논산 청양 금산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서 미결수로 3년간 구금되었고 1922년 9월 1일 경성복심법원 형무부속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前澤成美(전택성미)의 선고 공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으니 공의 나이 44세이다. 그 후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을 마치고 1930년에 출감하여 오직 조국 광복만을 기다리며 한 평생을 백절불굴의 투지로 일제의 삼엄한 감시 하에서도 항일 투쟁의 의지를 불태웠으니 민족의 등불이요 선구자였다. 공은 학수고대하던 광복의 한을 푸시고 1948년 2월 11일에 서거하시니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이어 1990년 12월 26일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