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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영원한 힘과 빛을 남겨주신 외솔 선생과 이씨 부인 여기 누워 계시다.
한국의 국어학자 교육가 애국자 외솔 최 현배님은 울산에서 1894년 10월 19일에 최 병수님의 맏아드님으로 출생하셨다. 타고난 총명한 재질로 어려서부터 궁리하기를 좋아했고 주 시경 스승을 따라 우리말 연구에 정력을 모으셨다. 외국에 나가 십년 동안 철학과 교육학을 전공하고 나 한사람보다 더 크고 영원한 겨레에 몸바치기를 결정하시었다. 눌린 겨레의 앞날을 밝히려고 「조선민족 갱생의 도」를 지어 겨레의 생기를 되살리고 살아날 길을 열어 보이었다. 나라에 돌아오자, 연희전문학교와 여러 학교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셨다. 국어과를 담당하고, 연구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우리 말본을 지어냈으니 이는 우리 말본을 처음으로 체계있게 새로 정리하여 지어낸 큰 저술이었다. 조국혼을 살리고 민족 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여러 동지들과 같이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우리말 큰 사전」을 만들어 내니 모두 나라 안에서 처음 된 일이었다. 이렇게 과학화된 한글을 겨레의 살림살이에 널리 펴내려고 심혈을 다하셨다. 이에 놀란 일제는 임을 학교에서 강제로 사직시키었다. 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 기회에 한글 연구의 모든 이론과 문제를 두루 모아 정리하고 체계를 세워 「한글갈」을 지어셨다. 일제는 임을 교육계에서 쫓아냄으로 만족치 않고 조선어학회 사건을 꾸며 임과 다른 동지들을 잡아 가두고 혹독한 악형과 갖은 모욕을 다 했으나 임의 정신만은 꺾지 못하였다. 옥살이 삼년에 한글 가로 쓰기도 성안하셨다. 새 나라 세울 때 사회의 문란한 질서 늘어가던 거짓과 불의를 가슴아파하면서 조국에 바치는 정성을 쏟아 저술한 책이 훗날 내놓은 「나라 사랑의 길」이었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얻은 덤 삶을 겨레와 나라에 바치기로 결심한 임은 정부와 학교와 한글학회에서 교과서를 만들어 후생을 가르치고 한글 전용을 위한 활동에 임의 모든 학문의 권위와 알찬 인생의 향기를 나라 안팎에 널리 떨치고 풍기었다. 1954년 연세대학교로 돌아와 교단에서 강의하고 학교 행정에서 부총장과 재단에서 이사가 되어 연세대학교의 발전에 임의 깊은 학문과 슬기와 인격이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또 한글학회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온 재산을 내놓아 법인체를 만들었고 세종 임김의 공덕을 길이 기리기 위하여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세종실록을 번역 발행하며 기념관을 이룩하였고 한글의 기계화를 위하여 연구소를 만들었다. 1949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쉬운말 사전」「새 한글 사전」을 편찬하고 「한국 고금 지명 총람」을 엮으며 「큰 사전」을 다시 손보는데 온 정력을 기울이셨다. 이에 학교로서는 문학박사의 학위로 학자의 지위를 높이고 퇴직함에 미쳐 명예 교수로 모시었다. 학술원에서는 1955년에 학술 공로상을 정부에서는 1962년 삼일절에 건국 공로 훈장을 1967년에는 오일륙 민족상을 각기 드리었다. 임은 이후에도 한글학회의 집을 새로 세우려고 애쓰는 한편 한글 연구 및 그 운동의 내력과 문제들을 두루 모아 큰 책을 엮어 오느라고 병석에 누울 사이도 없이 1970년 3월 23일 아침에 갑자기 이승을 떠나셨으니 아깝고 서럽도다. 나라의 여러 사회 단체들이 뜻을 같이 하여 정성을 모아 사회장으로 임의 장사를 치르었고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종하였으니 슬픔과 영광이 그지없었다. 안에서 임을 도움에 충성하시던 어진 이씨 부인은 임이 궃기신 지 십 구 일 만에 임의 뒤를 따라가시니 여기 임의 왼편에 모시었다. 아들로는 영해 신해 철해가 있으니 모두 사회에 알려진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