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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채기중,임세규,유창순,강순필등은 칠곡 친일부호 장승원을 처단한후 “일유광복(日維光復),천인시부(天人是符),성차대죄(聲此大罪),계아동포(戒我同胞),성계인(聲戒人),광복단”이라는 격고문을 붙여 광복회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1917년 12월 26일에는 우재룡,권영만 등이 경주 광명리 앞 길에서 대구로 수송 중이던 경주 영일 영덕군에서 강제로 거군 세금 팔천칠백원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충당하기도 하였으며1918년 1월 24일 우재룡이 전달한 권총으로 김한종, 장두환, 임세규,김경태 등은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에게 사형 선고문을 제시하고 처단함으로써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한훈의 지휘로 유장열, 곽경렬,이병하 등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 박곡리의 양재학을처단하고 유장열, 이병온 등은 보성군 벌교읍의 악질부호 서도현등 악질반역자들을 처단하여 대한광복회의 활동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수사망을 펴고 거액의 정보비를 뿌리며 혈안이 되었는데 1917년 12월에 천안의 이종국이 천안경찰서에 밀고하여 마침내 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되고 우편물검열로 1918년 본 김한종, 박상진, 채기중, 임세규, 강순필, 김경태, 장두환, 이병온, 장남칠등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0년 심영택, 소진형의 주비단과 합류한 우재룡, 권영만과 김상옥의 암살단과 합류한 한훈이 활동 중 피검됨으로써 풍기광복단의 중심인물들이 모두 체포 구금되었다.일경에 체포된 400여명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며 1920년 8월 박상진,김한종은 대구에서 채기중,김경태,임세규,는 서울에서 처형 순국 하였고 장두환은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이 무렵에 체포 구금된 광복단원은 다음과 같다. 명단생략(85명)등이다대한광복회는 국내 및 만주지역에까지 조직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3.1운동과 1920년대의 독립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단체로서 많은 단원들이 구금되고 순국하였거나 해외로 망명을 하자 일시적으로 활동이 위축된 듯 보였으나 남은 단원들은 한훈을 중심으로 다시 뭉쳐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면서 우리의 독립의지를 드높인 광복단이 이 고장 풍기에서 조직되고 풍기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가슴 뿌듯한 긍지로 간직하면서 선열들의 거룩하고 고귀한 뜻이 길이 후손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돌에 새긴다. 1995년 8월 일 김계하 모으고 송종섭 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