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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유적지 안내판 3 제주4·3기념성당 알아야 하는 역사, 기억해야 하는 이름, 제주4·3 제주 4·3 사건의 개요 ■ 배경 (사진설명)해방의 감격. 1945년 8월 15일, 35년간 일제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의 기쁨을 맞았으나 미군과 소련군이 남과 북에 들어와 38도선을 경계로 주둔함으로서 원하지 않는 분단 상황이 이뤄졌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를 떠나 살던 7만 여명에 이르는 이들이 해방 직후 부푼 희망을 품고 고향 제주로 돌아오면서 해방 전 22만여 명이던 제주 인구가 해방 후에는 27만 6천여 명으로 급증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치안 활동에 주력하면서 일본군 패잔병의 횡포를 막고 토지, 산업시설들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 면별로 초등학교, 중학원을 설립하면서 자치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제주도는 실제적으로 인민위원회가 도내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주도하였습니다. 미군은 1945년 9월 28일 제주에 들어왔고 이후 군정업무를 담당하는 제 59군정중대가 11월 9일 들어왔지만 당시 이미 자치적인 영향력이 강했던 제주인민위원회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설명) 7만 인구의 귀환. 일제강점기에 제주를 떠나 살던 7만 여명에 이르는 이들이 해방 직후 고향 제주로 돌아오면서 해방 전 22만여 명이던 제주 인구가 해방 후에는 27만 6천여 명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행정기관이나 통치기구로 인정하지 않았고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않혔으며, 서서히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으로 키워갔습니다. 그리고 1946년 8월 1일 제주도( 島) 가 행정구역인 제주도( 道) 로 승격되면서 경찰 병력이 증강되고 조선경비대 9연대가 창설되는 등 공권력이 강화되자 1946년 말부터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직접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 강행은 도민들의 불만을 가져왔고 광복 직후 식량 생산이 감소하여 양곡 부족의 상태가 지속되면서 식량 가격이 폭등하였고 더구나 전국적인 가뭄 속에서 갑작스럽게 인구가 유입된 제주도는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었음에도 미군정은 보리까지도 거두어들이는 미곡 정책 실패로 생존이 위협다는 경제적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발단 인민위원회의 좌익진영은 해방 2주년이 되는 1947년 3월 1일 기념식을 전도민적 행사로 치르기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3·1절 행사에서 시위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행사를 주관하는 좌익진영(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미군정 당국이 몇 차례 만나 협의하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미군정은 충남·북 응원경찰 100명을 제주에 급파하며 비상경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