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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지는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조국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였으며, 황상규(黃尙奎)·고인덕(高仁德)·김원봉(金元鳳) 등과 동화학원(東和學院)에서 2세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917년부터는 만주의 길림(吉林), 봉천(奉天)지방을 왕래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1918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동삼성(東三省)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이어서 김동삼(金東三)·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밀양군 조사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후 임시정부 교통차장, 내무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1년 1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임시정부와 별개로 조직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에 참여하여 이상용(李相龍)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그는 내무총장에 임명되어 소위 삼남파(三南派)에 의한 정부를 경영하기로 하였다. 1920년에는 김원봉(金原鳳)의 의열단(義烈團) 조직에 음으로 양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곽재기(郭在驥)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및 일제 요인 사살 계획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1925년까지 의열단장 김원봉의 자문에 응하여 무장항일 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8년에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길림성 영고탑(吉林省 寧古塔)에서 의료업(醫療業)에 종사하면서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빈강성 파언현(濱江省 巴彦縣)에서 영면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