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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탐방하신 등산객의 사진에 의하면 이 고추밭앞에 벙커고지 안내판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아무런 흔적도 없다. 사진출처 : https://hhk2001.tistory.com/1980 홍천 장재울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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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 육군 제 11기계화 보병사단이 발굴한 ‘벙커고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홍천군 화촌면 장재울에 위치한 '벙커고지’는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51년, 당시 중공군 1차 춘계공세로 후퇴를 거듭하던 중동부전선 미 제 10군단은 ‘공세이전을 위한 발판으로 홍천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미 제 2사단에 부여한다. 이에 따라 미 2사단 예하 38연대 3대대는 홍천북방 16km지점 778고지 일대(벙커고지) 방어임무를 맡게 된다.  당시 대대장을 맡고 있던 미 헤이스 중령은 고지 일대에 호를 구축하여 대대원 전원이 사격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진지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5월 2일부터 9일까지 8일간에 걸쳐 견고한 각종 호를 구축하고 철조망 가설, 지뢰지대 설치, 유선 매설 등 견고한 축성 공사를 완료한다.  암반에 호를 파고 갱목과 모래주머니로 덮어 쌓는 형식으로 고지 정상에는 대대 관측소를 비롯하여 23개의 엄체호가 완성되었는데, 이때의 산 모습이 마치 벌에 쏘인 아이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Bunker 高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실제로 ‘벙거-힐’은 미국 보스턴의 한 언덕지명으로 독립전쟁 당시 치열했던 격전지였다.  적은 5월 17일 22시경 은밀히 아군 진지로 접근한 후 기습공격을 가해온다. 적의 기습공격으로 3대대는 결국 벙커고지 정상마저 빼앗기게 된다. 이후 아군은 역습을 감행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벙커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다음날 방어진지에 대한 전반적인 보강작업이 실시된다.  적은 또다시 일몰과 동시에 916고지 방향에서 벙커고지로 밀어닥쳐 철조망 부근에 이르러 5회에 걸친 파상 공격을 감행해왔고 이때마다 아군은 성공적으로 이들을 격퇴해 낸다. 여섯 번째 적의 돌격이 개시되자 3대대 K중대장은 전 병력을 호안으로 들여보낸 후, 출입문을 모래주머니로 밀폐하여 마치 철수한 것처럼 적을 기만한다.  적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진내로 들어왔고, 바로 이때 진내사격이 개시되어 8분간에 걸쳐 무려 2000여 발의 포탄이 벙커고지에 쏟아져 내렸다. 적은 완전히 격멸되었고 더 이상 공격 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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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은 벙커고지 동쪽의 속사리와 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돌파구를 형성하였으나 이 벙커고지를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홍천방면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공세 종말점에 달해 결국 공격작전에서 방어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 벙커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끔에 따라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고 결국 나라를 지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츨처 : 강원도민신문 2007년 6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