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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영해! 동학혁명은 여기서 시작되었다.혁명은 전율이다! 혁명은 한 시각의 생멸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구조를 바꾸는 긴 과정이다. 이 과정은 단순히 정치권력의 뒤바꿈뿐만 아니라 민(民) 다수의 삶의 가치가 조화로운 창조적 전진을 해야 한다. 근대혁명의 대표적 사건으로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을 들지만, 19세기 중엽에 조선대륙에서 흥기한 동학혁명사상은 프랑스의 인권선언보다도 훨씬 더 근원적인 범인유적 미래 비젼을 제시하고 있다. 서양은 신 앞의 인간의 평등을 말하지만, 동학은 하느님과 인간의 평등, 그 양자가 협동하는 역사를 말한다. 이 인내천의 사상은 경주 용담에서 태어났지만, 수운의 철학을 사회화시키고 조직적 운동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영해.영덕 지역의 사람들이었다. 수운은 고향 경주에서는 영남유생들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영해는 경주에 인접해 있는, 동해안의 유니크한 대평원지대로서 농수산자원이 풍부하고 교양수준이 높았다. 신.구향의 대립으로 개화된 신향의 사람들은 반상서얼의 차별을 철폐하는 동학사상을 충심으로 수용하고 그 운동을 신향의 기치로 내걸었으며 동학운동의 하부구조를 구축하였다. 그 중심인물이 훗날 수운의 일대기를 집필한 영해 인천리의 박하선(朴夏善) 접주였다. 수운이 처형된 후 도통을 전수받은 해월은 고비원주(高飛遠走)의 피신생활을 계속했지만 결국 보호막이 탄탄한 이 지역 일월산에서 "다시개벽"의 비밀아지트를 마련한다. 이필제는 조선왕저를 뒤엎는 정치혁명이 없이도 동학도, 이 민족의 미래도 없다는 확관 신념을 지닌 전문혁명가였다. 그는 "교조신원"과 "광제챙생"의 명분을 내걸고 영해로 와서 해월을 만난다. 필제의 끈질긴 설득 끝에 해월은 이필제의 주장에 대다수의 동학도인들이 찬동하는 것을 보고 기포를 명한다. 불과 나흘만에 의관을 정제한 육백명의 도유들이 모인다. 1871년 3월 10일 인간평등의 깃발을 든 민중들은 정확한 판결문을 포고하고 탐학을 일삼는 영해부사를 처단한다. 이 사건으로 100여명의 선비들이 목숨을 잃어 동학운동이 좌절되는 듯이 보였지만 오히려 동학은 청지화되고 사회화되고 조직화되어 해월의 피신행각을 위대한 거국적 혁명의 행진으로 만들었다. 이필제는 문경에서 재차 기의하여 같은 해 12월 24일 서울에서 처형됨으로써 해월지도부에게 의리를 지키고 혁명가다웁게 생애를 마감하였다. 영해의 신미동학혁명이야말로 조선민중 혁명정신의 근원이며 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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銘(명)하여 말한다. 月逝闢世寧海朗 달이 가니 세상은 개벽되고, 영해 앞바다의 해맑은 기운은 낭랑키만 하다. 新鄉升龍不移象 영해영덕의 뜻있는 선비들이 용담의 용을 하늘로 올리고, 인간이 서로에게 소외되지 않는, 새로운 하늘의 모습을 지었다. 革命生生鼓躍易 혁명은 생하고 또 생하는 우주창조의 과정, 지금도 여기 우리 삶의 와중에서 약동친다. 勿忘屛風天德廣 이지말자! 형제봉 병풍바위 아래 모인 신미년 그날 육백 영웅들의 포효는 하늘의 덕을 이 땅위에 끝없이 펼치셨도다! 2024년 4월 29일 도올 김용옥 짓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