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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단체인 정의부 군정서및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6년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뒤 장진홍의사의 조선은행대구지점 폭파사건의 피의자로서 백형 원기 숙제 원일과 함께 2년 7개월간 모진 옥고를 치렀으며 1930년에도 대구의 격문사건으로 6개월간 수감된바있다. 1932년 가을 중국에 있었던 조선군관학교에 입교 이듬해 봄에 졸업하였고 또한 북경대학사회학과에서도 수학하였다. 1933년 신조선지에 황혼을 발표한뒤 10년간 시와 평론과 수필을 쓰고 중외일보 조광사 인문사등 언론기관에 몸담기도하였으나 급기야 1943년 가을 서울에서 피검되어 이듬해 1월 16일 새벽 북경에서 옥사하니 향년 40이 채못되어서였다. 유해는 현지에서 일본관헌에 의해 화장되었고 그 유해는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공과 부인 순흥안씨 사이의 1점 혁육인 딸 옥비는 양진호에게 출가하오 계제 원창의 3남 동박이 후사로 입양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