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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강직하고 결단성있는 성품을 지진 선생은 끝내 왜인의 종이 됨을 거부하고 1915년 3월 동생 허규와 큰집 조카등 가솔을 인솔하고 남만주 통화현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만주에는 이미 왕산공의 유족이 먼저가 있었고 성산선생은 재만 한족의 자치기관인 부민단의 초대단장으로 활동중이었다. 당시 통화현에는 성산선생과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등 민족 지도자들이 조국광복의 념원을 키워가고 있을때였다. 일창 허발선생은 이곳에 도착후 종숙 성산을 도와 1918년 부단만의 단총이라는 중책을 맏고 남만주 교거동포 30만의 민생교육 군사의 제 사업실무를 관장하였다. 망명전의 화문귀족들이 의병봉기로 세전가산을 쾌척하고 북녁땅의 풍찬노숙을 즐거이 택한 망명생활은 더욱 동지적 결속을 이루어 일창선생일가와 그곳 서로군정서 독변 석주 이상룡선생과는 이른바 겹사돈이 되었던 것이다.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대한독립군의 대승에 자극받은 일제는 대규모의 병력을 남만주에 출병시켜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대일 독립운동가들은 타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지않을수 없게되어 일창일가는 1921년 북만주 철영하로 일시 피난중 그곳에서 부형 범산선생의 임종을 당하여 영?으로 다시 한번 망국의 눈물을 뿌려야만 했다. 당시 일창선생의 아우 이규는 국내에 잠입 3.1운동가사후 피검옥고중이었다. 그후 할빈 남쪽 오상현으로 이주한 뒤에는 일창한약방을 경영하며 동지들을 다시 규합하고 그 연락처 역할을 하여 여준 이장녕등 제씨와 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광복후 성재 이시영선생과의 유별한 우정도 이때의 교우에서 비롯되었다고한다. 1930년 12월에는 부인 산운이씨를 여의고 다음해 일제의 만주강점으로 활동의 근거를 잃게되자 10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중인 동생의 옥바라지라도 하겠다고 이순 자발의 시름겨운 발길로 압록강을 건너와 은둔칩거하다가 광복을 맞이 하게되었다. 이와 같이 일창 허발선생형제와 그 부조일가의 항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