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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극의 전말 1) 예비검속. 모슬포 경찰서 관내 각 지서(한림, 대정, 두모, 고산, 저지, 무릉, 안덕)에서는 1950년 6월과 7월 무고한 농민, 공무원, 마을유지, 부녀자, 학생 등 344명을 구인하여 모슬포 절간창고와 한림수협창고및 무릉지서에서 분산수용. 경찰의 감호하에 가족과의 면회를 허용하고 지병자의 병보석을 시행하던 등 유화적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사찰계장(채○○)의 주관하에 자의적 판단에 따라 A(23명), B(68명) C(144명) D(109명) 4등급으로 분류 살생부를 작성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것으로 사료됨 2) 집단학살과 암매장. 1950년 6월 25일 북괴군의 남침으로 서울을 떠난 정부는 대전을 거쳐 대구, 부산으로 퇴각하였으며 낙동강 전선이 누란지세에 처하게 되자 정부의 최종 피난처를 제주도로 잠정 결정하여 계엄사령부에 송치된 252명 중 61명이 동년 7월 16일 정부군에 인계된후 20명은 섯알오름에서 학살하고 나머지 41명은 행방불명 상태인 가운데 동년 9월 20일 새벽 2시부터 5시사이 세곳의 구금자를 순차에 따라 학살장소로 이송하는 과정에 자택에 있던 대정면 사무소 공우뭥 이현필 좌용운을 비롯 정이환(청년회 총무) 장성림(연초판매) 좌용문(도정업) 이상봉(청년회간부) 등 6명을 학살장소로 무단 강제 압송할때 이승과 저승 간 절연의 황천길에 신발을 벗어던져 족적을 알리며 섯알오름 탄약고터에 이르자 앞에 이송된 한림수협창고와 무릉지서에 구금되었던 60여명을 폭파된 탄약고 남사면에서 모슬포 절간창고에 구금되었던 130여명은 물웅덩이에서 모슬포 주둔 정부군에 의해 집단 학살한후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도하지 않고 암매장 하였으며 그 비인도적인 만행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민간인 출입통제하는 한편 군.경에 의한 경비를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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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NA검사로 60년의 한을 풀다. 1950년 7월 16일 41명을 집단학살한 가해자들의 함구령으로 희생자들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산방산 앞바다 수장설등으로 억측이 난무하여 60여년 동안 망연자실 번민하던차 2007년 11월 27일 정뜨르비행장 민간인 학살장소에서 발굴한 유해DNA검사결과(2010.3) 행불자 41명중 송대길(청년회임원) 김희전(대정고교고사)등의 신원이 확인됨으로써 행발불명된 전원이 동일장소에서 학살된것으로 추정하게 되었으며 2010년 국가상대 손해배상소송에 동참하는 한편 양신하(백조일손유족회 고문)의 적극적인 탐문조자과정을 통하여 당시 희생자 신원을 확인하게 되자 예비검속 섯알오름사건 행방불명유족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음. 한편 신원확인을 못한 수많은 유가족들은 하루속히 DNA검사가 이루어지길 애타게 기다리며 국가에 대한 원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