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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교육자로서 또한 성실한 인간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교사로는 낙빙정이 사용되었으나 시설은 태무하고 재정은 빈궁하였으며 선생의 사생활은 극히 궁핍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시종일관 임기처변하여 갖은 고난과 풍상을 극복하면서 수십년에 긍하여 수많은 자녀를 훈육하여 전진을 밝혀주었다. 선생이 아니고서 그 누가 이를 감당하였으리오. 선생과 영신의숙은 숙명적인 인연이었다. 선생의 덕성과 식견은 이 고장 일반 인사계몽에도 영향이 지대하여 지역사회 근대화에 역군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선생의 젊으과 반생을 바친 영신의숙이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1943년에 막을 내라지 선생은 풍천 대창학교와 우망국민학교에서 자녀교육에 여생을 기울이고 1949년 6월에 우망일우에서 서거하니 중인 애도리에 우운산 동록에 예장되었으며 유족으로 초배 반남박씨는 무사하고 후배 안동권씨와 사자 내형이있다. 세사는 덧없어 선생이 가신지도 어언 이십유여 성상 고색 짙은 낙빈정사에는 예나 다름없이 백운이 유유히 오가며 고사를 회상케 한다. 인생은 사라져도 역사는 남아 전하는 것 선생의 불후의 공적은 길이 빛나리라. 이에 선생을 추모하는 문생들과 뜻있는 인사들이 정성을 모아 선생의 공로를 기리며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980년 9월 16일 전 국회의원 문생 정진동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