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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이 절정에 이르자 선생은 구국의 일념으로 기회를 보던 중 1907년 9월 12일에 결성한 호남의병 창의동맹단에 가담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의병장인 정재 이석용은 고향 친구 사이로 의병활동 중 본인의 재산도 아낌없이 헌납하였음은 물론 의병 40여명과 함께 처가 동네 부자집과 인근의 인사들을 찾아가 많은 군자금과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이에 힘입어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활발하게 작전을 전개하여 임실은 물론 진안 장수 무주 남원 곡성과 멀리는 함양 거창까지 누비며 왜적들과 수십여 차례 격전을 치러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8년 3월 21일 성수 운현전투와 동년 4월 11일 상관의 동장집 등 여러곳에서 군수 금품 갹출 등으로 함께 한 의병들의 사기를 높혔음은 물론 의병활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일경들이 선생을 추적하여 체포하기 직전인 1909년 2월경 자수하였으나 6개월 후인 동년 8월 재판에 회부되어 전주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 수감되어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후에는 고문에 의한 옥중 후유증으로 인하여 투병생활을 하다가 1924년 9월 24일 향년 38수로 운명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공훈은 오래도록 세간에 알려지지 못하여 현창하는 사람 하나없이 지내다가 손자인 종택이 늦게나마 국가보훈처에 포상신청을 하여 2006년 11월 17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에 후손들은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치신 선조를 추모하고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선생의 고향인 갈마마을에 유허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