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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김태원 등과 같이 태인·진안 등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면암 최익현이 의거 준비를 할 때 일시 연락관계를 맺어 거사의 효과적 전개를 꾀하기도 하였다. 한때 면암 의진의 소모 오위장을 지냈으며, 그후 면암 의진은 순창에서 적에게 패하고 주장들이 모두 체포 유배되었다. 면암은 대마도로 유배당하였는데 그를 방문하여 버선 1켤레와 일화 20냥 등을 차입하고 돌아왔다. 1913년에는 돈헌 임병찬과 함께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1914년에 고종황제의 밀조를 받았으며 독립의군부의 조직이 적에게 탐지되어 울릉도로 유배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영남유림이 중심이 된 파리장서에 유림대표로 서명하였다. 1921년에는 조선고사 연구회를 발기하여 동지를 규합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