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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25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을미사변(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을 다시 본다’ 왕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한 일도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일본은 당시 친일 개화파인 박영효와 서광 범을 귀국시켜 조선 내정개혁에 일정한 역할을 하게 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에게 간절한 사죄 상소를 올린 결과 반역의 죄를 면하고 1894년 12월 갑오개혁의 2차 내각이 구성되던 시기에 내무대신으로 정계에 화려 하게 복귀하였다. 고종은 일본과 원만한 관계를 유 지하기 위해 일본 정계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이 있 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박영효는 적격이 었다. 이러한 사정을 꿰뚫고 있던 명성황후는 앞장 서서 박영효의 복작(復爵)을 논의하면서 옷감과 저택 을 내려주기도 하고, 정부가 몰수했던 그의 재산을 돌려주기도 하면서 신뢰 관계를 회복하려 하였다. 박영효가 혹시라도 대원군 측과 밀착될까 우려 하여 박영효를 황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하 였다. 국왕의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박영효와 같 은 친일 개화파를 활용하면서 고종의 조력자로 움직 인 것이다. 황후는 다양한 방식으로 국정에 관여했는데, 그 실상은 그녀가 친인척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황후의 국정 개입은 인사 문제, 종묘제례나 별 시(別試)의 시행 문제, 화폐 주조와 관련한 정치의 전 영역에 걸쳐 있었다. 인사 문제에 있어서도 황후는 홍문관과 6조, 선혜청 등을 비롯한 중앙의 주요 관 직, 군수나 현감 등의 지방관직, 역관직, 무과직을 막 론하고 거의 무차별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황후 가 개입하는 경로는 민영소와 그의 주변 인물의 소 개로 금전이 결합된 청탁을 받고 고종에게 의논하여 직위와 가부(可否)를 결정해 알리는 방식이었다. 고 종이 거절하거나 거부하면 명성황후의 의지가 관철 되기는 어려웠다. 명성황후가 인사개입이나 국정 관 여 등 정치에 참여하고 권력을 행사한 방식은 고종 명성황후가 일가 친척에게 보낸 한글 편지 일본 큐슈의 쿠시다신사[櫛田神社]에서 켄노스케 궁사(宮司)가 명 성황후 참살 때 쓰였다는 칼(肥前刀)을 빼서 보여주고 있다(한겨레 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