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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25년 3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3 · 1운동의 지역적 전개 양상과 특징 ②’ 있던 김선두(金善斗)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서문외 교회 전도사로 있던 정일선(丁一善) 장로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산정현교회를 담임 하던 강규찬(姜奎燦) 목사가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어서 윤원삼의 만세 3창으로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만세시위에 들어가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3대 로 나뉘어 시내를 행진했다. 또 남산현교회에서 출 발한 감리교계 시위대와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출 발한 천도교계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이날 저녁 8시경에는 숭실대학 밴드부와 숭실중 학 밴드부가 연합하여 숭실대학 교정에 모여 양악 (행진곡)을 연주하며 만세시위대에 앞장서 교정을 한 바퀴 돌고 학당골 앞을 지나 시내로 행진하던 중 완전무장한 일본군대의 저지로 해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평양의 만세시위는 일본 경찰의 가혹 한 탄압 속에서도 3월 5일까지 격렬하게 계속되었는 데, 일제 헌병 경찰은 3월 2일 새벽부터 주동자 체포 에 들어가 3월 8일까지 검거한 인원수만도 400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154명은 태형 혹은 즉결로 처분 하고, 주동자로 생각되던 48명은 기소하기 위해 평 양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겼다. 진남포에서의 3·1운동 준비는 1919년 2월 18일 진남포 삼숭학교 교장이자 신흥리교회 전도사인 홍 기황(洪基璜)이 평양에서 남산현교회 목사 신홍식(申 洪植)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신홍식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참여하겠 다고 말하고 진남포로 돌아와, 2월 22일경 노윤길 (盧允吉), 최병훈(崔秉勳), 이겸로(李謙魯), 송영환(宋 永煥)과 함께 하기로 찬동을 얻었다. 2월 25일 다시 1893년 경의 평양 장대현교회  1920년대 평양 남산현교회 신도들(출처 : UMC 디지털 갤러리) 길선주(1869~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