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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24년 4월 Special Theme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특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움직인 지도자들’  합격하여 충청 북도 재판소 소 속의 검사로 근 무하였으나, 2 년 뒤 그만두었 다. ‘변호사로서 법정투쟁을 위 해 의병사건의 논고를 거부하 고 검사직을 사 임하였다’는 말 을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왜 검사를 그만 두었는지 조금 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검사를 그만 둔 뒤 홍진은 평양에서 변호 사로 활동하였 다. 이 때 평양 에서 여러 사람 을 만나게 되는 데, 이규갑(李奎 甲), 김응섭(金 應燮), 황옥(黃玉) 등이 그들이었다. 이규갑은 1919년 한성정부 수립을 함께 추진하였으며, 황옥은 1919년 4월 상하이로 무사히 건너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 지 않았다. 김응섭은 상하이와 만주에서의 활동에 큰 버팀목이 되었다. 3 · 1운동 직후 한성정부 수립에 참여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 원). 20여 명이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 손에 흰색 종 이나 헝겊으로 표시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13도대 표자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이었다. 홍진 역시 이 대 회에 적극 참석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일어났다. 홍진은 이 소식 을 듣고 이규갑과 함께 법조계, 기독교계는 물론 유 교와 학생계열 등 다양한 인사들을 만나며 임시정부 수립과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7일 한성오(韓聖五)의 집에서 회합이 열렸다. 홍진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임시정부의 이름을 ‘한성 정부’라 결정하고, 집정관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을 선출하였다. 또한 ‘한성정부’의 헌법인 ‘약법’(約法)도 제정하였다. 이 들은 4월 2일 인천에서 13도대표자대회를 열어 ‘한 성정부’의 수립안을 통과시키고, 국민대회를 열어 수립을 공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실제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는 위에서 말했던 대로 서울 · 인천 등 주변의 인사 20여 명만 참여했다. 다른 지방의 대 표들은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홍진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지 확 인하고자 했다. 이에 한남수를 4월 8일 상하이로 보 냈다. 그러나 마냥 연락을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이 었다. 이에 담뱃갑과 성냥갑에 한성정부 조직안과 약법 등을 숨겨 이규갑과 함께 직접 상하이로 건너 가게 되었다. 홍진(홍면희)의 변호사 인가장(국회도서 관 소장) 1920년대 홍진의 모습(한국이민사 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