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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틈타 죽릉리 어동의 자택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신출귀몰하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던 왜경의 거미줄같은 포위망과 주변에 잠복시켰던 일본주구의 정탐에 의하여 밀고되기에 이르자 당시 일진회 회장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이 이끌고 온 토벌대에 체포된 후 온갖 고문과 악행을 당한 끝어 서대문형무소에서 8년간의 옥고를 치루시었고 1920년 12월 만주로 망명하신 후에는 중국 통화현 흡니하(洽泥河) 남만주 신흥무관학교에 다니던 장남 광선과 합류하면서 광선이 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 제1대장을 시발로 항일전선에 나서자 부자가 함께 독립투쟁을 계속하였을뿐만 아니라 아들 광선이 이청천 등과 함께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광선의 처는 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장녀인 희영과 그의 남편 신송식은 한국청년정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와 광복군에서 차녀 희옥은 한국광복연선(連線) 청년공작대와 광복군제5지대에서 활약하는 등 선생으로부터 손녀에 이르기까지 3대를 이어 항일독립투쟁에 이바지하여 청사에 빛나는 장한 업적을 남기시니 이러한 예는 독립투쟁사상 찾아보기 힘든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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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장남 광선은 광복후 제2훈련소장과 대전병사국사령관을 역임하고 육군준장으로 예편하였으나 그러나 선생께서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시지 못한채 1935년 1월 23일 67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시어 이국 하늘 아래 불귀의 넋이 되시었다. 오호라 광복 반백년이 지나도록 선생일문의 빛나는 공적이 기려지지 못해왔음을 실로 안타깝게 여겨왔더니 작금에 이르러 한일간의 역사를 왜곡 기술하는 등 방만불손한 일본극우 잔존세력들의 식민사관에 온 국민이 분노하는 때를 당하여 님들의 애국독립정신이 이 강산에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온 천하에 밝히고 이를 후세에 전하고자 해주오씨 호군공파 용인시 원삼면 대종회 회장 이하 종원의 일치된 의견을 모아 이에 비를 세우고 명(銘)하노니 오호라 장하시도다 선생일문의 구국정신과 애국애정은 이 산하를 덮고도 넘치는도다. 공의 대성존명(大姓尊名) 청사에 빛나시니 그 큰뜻 만분의일이나마 헤아려 돌에 새김이 마땅하도다. 이곳은 선생께서 태어나신 곳 나라에 흥망은 있었으도 산천은 예대로 의구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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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오광선선생, 며느리 정정숙여사, 장손녀 오희영여사와 남편 신송식, 차손녀 오희옥여사 모두 서훈이 되셨지만
정작 오인수선생이 서훈되지 못한 이유를 정현숙지사 생가에서 물어보니, 오인수선생의 기록을 찾을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