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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에 망명투사로 언론과 풍채가 출중하고 광복 건국 후에 온 국민의 추앙을 받은 이가 있었다면 그는 바로 고 해공 신옹이라고 하겠다. 공이야말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 구비한 이로 거대한 자취와 깊은 인상을 남기고 간 이었다. 그의 이름은 익희 자는 여구, 관은 평산이니 해공은 자호였다. 그의 선대에는 각공신경이 연다라 나왔으며 그의 선고도 벼슬이 자헌대부 장례원경에 이르렀다. 해공은 국내외로 다사다난하던 고종 갑오 즉 1894년 9월에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휘 단의 제5남으로 태어났다. 명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대에 이미 한문 경전을 통독하고 그 후 서울로 올라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조도전대학(와세다대학) 고등예과를 거처 학부의 정경대학에 압학하였다. 이때는 조대 우리 유학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때니 동학과동급에는 양원모 동학과 상급에는 장덕수 철학과에는 최두선 고등예과에는 현상윤 김전제등등의 수재가 있었던 까닭이다. 공은 1917년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의 교수로 취임 후학자도에 전력하였다. 1919년에 임규, 최린, 최남선, 윤홍섭, 송진우 등과 더불어 3.1독립운동을 모의 거사한 뒤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들과 같이 임시정부 수립에 진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