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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 선생의 휘는 규영 본관은 추계이며 고려 충렬왕조 민부상서 예문관 대제학 로당 추적의 22세손이다. 1903년 8월 11일 부산 동래지방의 선각자로 유지들을 힘을 모아 폐교위기에 직면한 동래일신여학교를 오늘의 동래여자중고등학교로 중흥케 한 국촌 추봉찬 선생과 밀양인 박명선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강기했던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정진하다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진학 신학문에 접하면서 근대 민족주의 사상과 반일애국운동에 ○안하여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새나라 건설에 몸을 바쳤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16세 소년으로 학우들과 3월 13일 동래지방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이해 4월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출판법 위반으로 1년형을 선고받고 1920년 봄 출옥하였다. 이후 선생은 옥고로 상한 몸을 무릅쓰고 국외 망명과 동경 유학을 시도하며 재기의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뜻한 바 있어 1926년 서부경남 벽지 농촌에 들어가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함양군 서상면 창령군 부곡면 고성군 배둔면 등지의 산촌으로 18년간 전전하며 선생이 심혈을 쏟은 일은 농민들의 문맹퇴치와 농가 소득 증대운동이었다. 신품종 감자를 보급시키고 흉년으로 굶주리는 농민들을 빚을 내어 구휼하는 등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헌신하니 그때 농민들이 세운 공덕비가 지금도 서상면 농협 정문에 서 있으니 이제총집 유수공 구황시급 ○○제○탄성목이위중모충만구일석영운덕숭의 송명을 각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선생은 농협 경남지부 창설에 참여하고 이후 관계에 투신 1951년에는 부산사세청장으로 전시의 피폐한 세무의 기를 잡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피난 수도 부산지방은 전시 재정 조달의 터밭이기도 했다. 이때 불철주야 헌신적인 노력으로 1953년에는 전라남도지사에 천거되니 3.1운동에 소년입지한 그의 구국대장정에 겨레가 베푼 보답이었다. 전남지사 2년간 선생은 전쟁 중 해이된 이도를 쇄신하고 평생의 꿈인 농촌 근대화를 위한 농업기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