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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대문호이며 민중의 시인인 고려시대의 이규보선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 향토 여주에 문학비를 세운다. 선생은 자가 춘경이요 호는 백운거사이며 시호는 문순공인데 그의 집은 대대로 여천에서 살아온 토성의 가문으로 조상들은 이 고을에서 호장교위등 향직에 종사하다가 부친 윤수공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관리로 수도 개성에 진출하였다. 1168년 음력 12월 16일 여주에서 탄생한 선생은 어릴적부터 부친을 따라 개성에서 살았다. 그런데 여주에서는 호적이 그대로 있었고 농토도 그대로 두었다. 후일 선생이 29세때에 잠시 여주에 돌아와 여러 시편을 남겼는데 그 중에 '일가친척은 호적에서찾고 농토는 선세의 두둑을 묻노라' 라고한 구절이 그것이다. 선생은 여주의 산천풍물을 사랑하여 이 고장에 살고파라 오활한 이 내몸에 알맞고녀 라고한 글귀가 있었지만 하늘이 내린 인재로서 시대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던 선생은 벼슬길에 나가서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였다. 64세때에 蝟島(위도)의 귀양살이에서 고향으로 옮겨와 몇개월 머물러있기도 했지만 곧 다시 개성으로 소환되었다. 선생의 시대인 12세기후반과 13세기 전반은 계란 여진에 뒤이어 몽고의 大寇(대구)가 계속 침입하여 외환의 소용돌이가 절정에 도달하였고 이에 대응하는 우리민족의 주체적 자세와 저항 정신이 또한 가장 고조된 시기였다 강화도를 보루로 장기간 몽고와 대치한 가운데 각지방의 장수 병사와 민중들은 강산을 들어 분묘로 만들정도로 적에 대한 처절한 전투와 뼈저린 희생을 이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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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26세에 이미 동명왕편을 지어 민족의 영웅과 역사를 노래한적이 있었거니와 이 위대한 민족의 수난기에 있어서 선생 시대를 대하는 문학자로서 수많은 시와 산문으로 긴박한 국난의 극복과 초조한 민심의 위무에 크나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8만대장경 각판의 국가적 대사업으로 적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진정하려는 온겨레의 염원을 담아 선생이 직접 군신기고문을 작성한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선생은 70세에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守大保門下侍郞(수태보문하시랑) 평장사로서 致仕(치사)를 하고 4년뒤에 세상을 떠났다. 강화군 진강산 남록에 지금 무덤이 잘보존되어있다. 선생의 시문은 전집 41권과 후집12권을 합하여 동국이상국집이라는 이름으로 총53권의 방대한 문집이 전해온다. 시가 7천~8천 수가 있었으나 현재 2088수가 보존되고 있다. 특별히 동국이라는 두글자를 붙인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한문의 세계에서 중국문학과 구별되는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문학임을 뜻한다. 선생이 서거하신지 750여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