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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선생은 호는 지오 자는 군선 본관은 인천 아버지 병두 어머니 경주 최씨 증 영의정 공도공 이문화의 19대손이자 임진왜란 공신 태암공의 11대손으로 1880년 6월 11일 달성군 공산면 무태에서 태어나셨다. 1905년 한성 기호중학교를 졸업하시고 대구 협성학교 및 김동삼 선생과 더불어 안동 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교육구국에 힘쓰던 중 1910년 8월 마침내 나라가 쓰러지게 되니 한성으로 가 신민회 청년학우회 한성지회의 일원으로 이동녕 이회영 윤기섭 김좌진 등과 독립군 기지 창건을 목적으로 서간도로 망명하였으니 훗날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체 세력의 하나가 되었다. 이에 선생은 중국 심양에서 달신학교 및 중국어 학교를 설립하시고 무송현에 둔전을 조차하여 군자금을 만들고 청장년을 훈련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좌절을 당하자 같은 해 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에 참가. 5월 의거를 계획 국내에 잠입 김원봉 단장의 지령 아래 김지섭 김시현 유시태 홍종우 황옥 등과 모의하여 중국으로부터 폭탄 36개 권총 13정 폭탄 장치용 시계 6개 조선혁명선언서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 권고문 2천매 등을 국내에 반입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총독부 폭파 일보 직전에 동지 12명과 일경에 체포되어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신간회 발족에 참여 경성 중앙본부 총무와 경북 대구 지회장을 겸임하시면서 한때 30여 세포와 만여 회원을 포섭 활약하다가 밀양에서 검속되었다. 일제의 핍박이 극에 달한 중에도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향리에 숨어 밭을 갈며 회천의 시운을 기다리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1945년 과도정부 경상북도 부지사 1946년 1월 대구부 초대 부윤에 취임하였으나 군정의 비위에 환멸을 느껴 야인으로 돌아가 1946년 9월 5일 대한독립 촉성 국민회 경상북도 위원장 대종교 남사도 본사 선범 남선 경제신문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일생을 오로지 나라 걱정 민족 사랑으로 헌신하시다 광복 5년 1949년 12월 4일 별세하시니 향년 70세 국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해은 이강희 선생은 지오 선생의 친제로 1898년 2월 17일 대구 무태에서 태어나셨다. 형을 따라 서간도로 들어갔다가 중국 상해에서 여운형 선생의 도움으로 중국 상해 호강대학교에 재학 중 형이 의열단 사건으로 투옥되자 국내로 들어와 신간회 부산지회 총무 부산학우회 서무간사 부산협동조합장 등 민족운동에 전력하다가 1928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노차용 장택원 정대봉 등과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보강을 위해 비밀결사 「ㄱ」당을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룬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 용정 대성중학교 영어교사와 교감을 겸임 후세교육에 힘쓰며 기다리시다 1942년 이역만리에서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시니 국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형제 지사는 조국광복을 위하여 항일투쟁으로 평생을 헌신하였고 不義富(불의부) 不屈貴(불굴귀)로 淸貧如洗(청빈여세)하신 고귀한 생애는 청사에 빛날 것이다. 1993년 4월 일 문하생 광주 노기용 찬, 달성 서석준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