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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들은 구 속리산석재 뒤 둥글레봉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며 평화로움 속에서 위태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동학군들이 이곳에 있다는 첩보를 접한 일본군은 장안 구인리에 주둔하며 동학군을 치기 위해 밤 10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해월 최시형 등 동학군 지도자들은 김소천가와 지막골(금학동)에 막사를 지어놓고 지내고 있었다. 밤 10시 30분이 되자 일본군은 구인리에서 오창→누청→강신→성족→종곡리로 쳐들어갔고 동학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총소리에 놀란 동학군들은 마을 밖으로 달아났지만 일본군을 추격해 요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산으로 올라간 동학군들이 반격하며 한밤중에 총알이 우박을 뿌리듯 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동학군은 새벽까지 몇 번을 역습하는 전투를 계속했고 18일 오전에는 종곡부근 고지를 점령하며 일본군에 맞섰다. 일본군에 절대 밀리지 않으며 일본군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중과부적, 동학군이 보유하고 있던 총알이 모두 떨어지고 힘도 부쳤다. 동학군의 제1선이 취약해져 급기야 저지선이 무너졌고, 동학군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총알이 떨어진 동학군들은 몰살되고 말았다. 사망자가 2천600여명에 달했으며 그 때가 12월 18일 오후 3시였다. 살아남은 동학군들은 퇴로를 찾아 수철령을 넘고 북암리 터골을 거쳐 괴산, 강원도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북암리 부내실로도 10명이 숨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말티재를 넘어 북암리로 뒤쫓아온 일본군은 민가를 샅샅이 수색해 동학도를 색출했다. 여기서 꼬리를 밟힌 7명은 현장에서 죽고 3명은 부내실 주민들이 하인이라고 둘러대는 등 신분을 감춰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7명의 시체는 부내실 주민들이 집단매장을 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2017년 부내실 주민들의 증언을 채록, 확인한 것이다. 6월 3일에는 집단매장지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넋을 위로한 바 있다.
출처 : 보은사람들 2020년 '5월 11일 동학혁명 기념일에 즈음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