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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백한(伯漢)·이평(李平), 호는 하관(何觀). 서울 출신이다. 1910년에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1914년에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通化縣)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 이듬해 졸업하였다.1916년에는 간도의 교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17년 북만주 동녕현(東寧縣)에 호분중학교(虎賁中學校)를 설립하고 학감으로 재직하며 군사교육을 전담하였다.1920년 이동녕(李東寧)·박은식(朴殷植)으로부터 군자금 모금의 사명을 받고 귀국,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이후 대외용으로 만주농림주식회사(滿洲農林株式會社)를 설립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내기 위해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독립자금을 모금할 때는 만주농림주식회사의 주식모집원으로 가장하여 활동하도록 하였다.같은 해 8월 하순 신종선(申鍾善)으로부터 대동단 명의의 군자금 모금에 관한 권유문을 받아서 광주(光州)에 내려가, 노형규(盧衡奎)가 지명한 정인채(鄭麟采)·양사형(梁士亨) 등 여러 사람에게 우송하고 상경하였다.그 뒤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 명의의 포고문과 대동단 조선총지단(朝鮮總支團) 부장 한부(韓扶)의 이름으로 된 경고문을 전라남도 부호인 노종승(盧鍾升)·정해붕(鄭海鵬)·양재국(梁在國)·국채웅(鞠採雄) 등에게 발송하였다.같은 해 10월 광주에서 이윤호(李允鎬)·노석정(盧錫正)·김정련(金正連) 등을 부한청년단에 가입시키고, 신유선(辛有善)·정호필(鄭鎬弼)·정원채(鄭遠采) 등에게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군자금 모금원을 여러 반으로 나누어 1반은 박일봉(朴日鳳)·이윤호로 편성하여 화순과 나주 방면을 맡기고, 2반은 신덕영과 최양옥(崔養玉)·노기준(盧基準)으로 편성해 담양과 곡성 방면을 맡겨서 많은 군자금을 모아 상해의 임시정부로 보냈다.한편 임시정부의 특파원 한준호(韓俊鎬)·박문용(朴文容)·정용택(鄭容澤)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던 중, 같은 해 11월 최양옥·노기준이 광주에서 붙잡혀 신덕영도 담양경찰서원에게 붙잡혔다.1921년 5월 광주법원에서 징역 8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23년 5월 신병으로 가출옥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1927년 최양옥·안창남(安昌男)·김정련과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북만주에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해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최양옥·김정련을 국내에 파견, 설립 기금을 모금하려다가 두 사람이 모두 붙잡혀 좌절되었다.그 뒤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2년 6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전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1934년 10월 출옥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재외이재동포원호회(在外罹災同胞援護會)를 설립하고 독립투사들의 원호사업에 힘썼으며, 광복단(光復團)을 부활시켜 광복단중앙총본부 단장, 대한독립운동자동맹의 대표로서 건국사업에 노력하였다.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