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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독립만세기념비
관리번호 : 14-1-4 / 관리자 :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사무소
이 비석은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자 일본은 무단정치로 민족적 지도세력과 유지들의 말살정책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 자각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소생하게 하였고, 조직적인 애국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이는 일본이 독살한 것이라고 하여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고종 황제의 국상이 3월 3일로 정해지면서 많은 국민이 서울로 모이게 되었고 마침내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탑골공원으로부터 터져나왔다.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드디어 우리 고장 용유도에서도 조명원, 조정서, 최학봉(명교), 문수현, 김윤배, 윤치방, 윤보신(종칠), 유응렬, 오기섭, 구길서, 이난의 등 열한분이 3월 23일 혈성단을 조직하고 밤을 세워가며 대형 태극기와 격문 수백매를 만들어 거잠리, 을왕리, 덕교리, 남북리, 무의리의 집집마다 배포하고 궐기를 촉구했다. 약속한 그날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인 온 면민은 이 분들을 선두로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그 피맺힌 함성은 바다와 육지에 메아리쳤다. 비록 일본의 무력 앞에 억압되고 체포되어 2년 또는 6개월의 옥고를 면하지 못하고 독립은 찾지 못했지만 드높은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의식을 세계에 선양하고 민족의 결속을 강화하는데 밑거름이 되어 그 숭고한 뜻을 흘리신 피와 눈물로 하여금 하늘이 우리 민족을 돌아보아 광복의 날을 맞이하기에 이르렀으며 해와 달이 다하도록 그 의로운 정신 기리고 저 뜻을 모아 비를 세워 새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