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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는 1919년 기미 의거 당시 조국광복을 위해 몸 바친 상진 이경흠 지사의 유택이다. 공의 본관은 재령으로 시조는 신라의 개국공신 휘 알평인데 고려의 문하 시중 휘 우칭이 재령군에 봉해져서 재령으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고려 말기의 성균관 진사인 아은 선생 휘 오는 고려가 망하자 망목수의하여 함안의 아곡에 은거했는데 후손에 명현달사가 많이 났다. 공은 선생의 16대손이며 조고의 휘는 유숙이다. 고의 휘는 희오이고 비는 전주 이씨로 고종 11년 9월 함안 경정리에서 태어났다. 충고의 가훈을 이어받은 공은 품성이 인후하고 남달리 애국정신이 투칠하였다. 경술년에 왜경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강토가 유린당하자 공은 절치부심하여 의거를 결심하고 동지들과 결속하여 거사의 기틀을 다지며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마침 기미년 3월 1일 독립의거의 함성이 서울에서 터지다 이를 기폭으로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의거의 불길이 치솟았다. 공은 이고장 함안에서 분연히 일어나 의거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의 의거에 앞장서서 용약하다가 왜경의 주모자 검거망이 펴지자 이를 피한 공은 동지들을 재규합하고 야반 회동하여 명일 의거를 도모하였다. 익일인 군북 장날 동지들을 휘동하여 또다시 시위의 선봉에 선 공은 의기충천하여 왜경의 총칼에 맞서 당당히 항거하던 중 왜헌의 흉탄을 맞고 장렬히 순난하니 1919년 3월 20일이었다. 배위는 순흥안씨인데 공이 순난한 이튿날 공을 검거차 들이 닥친 왜경들에게 식칼로 대적하다가 도리어 이들의 모진 매에 불구의 몸이 되었다. 아들은 영호와 봉호를 두었는데 장남 영호도 선고의 의기를 받들어 왜경 치하에서는 만난을 인고하며 굳게 지조를 지켰고 평생을 애국일념으로 살았다. 손자는 병균 병진 병천이다.
공이 가신지 어언 60여년 성상 어둠과 혼란의 세월 속에 묻혀있던 공의 애국의적을 되밝혀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 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공의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수코저 정부의 후원으로 묘비를 세우게 되어 공의 장손 병균이 비문을 정하므로 그 사적을 대략 간추려 각명하도다.
서기 1984년 12월 길일 삼종질 재호 찬, 순흥후인 안창준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