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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범은 1919년 3월 6일 김복현(金福鉉)·김강(金剛)·서정희(徐廷禧) 등은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 최병준(崔丙浚), 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 교사 박애순(朴愛順) 등과 3월 10일 광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결행하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드디어 3월 10일 오후 3시 반경, 주도자들은 계획에 따라 광주교(光州橋) 밑 천변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천변을 따라 냇가로 올라와 작은 시장으로 진출하여 시위대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이 곳을 출발하여 서문통(西門通)을 경유하여 우편국 앞에 이르러 왼편으로 돌아 본정통(本町通)으로 행진하였다. 이 때 누문리(樓門里) 방면에서 농업학교 학생 등 수백 명의 시위군중이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행진하였다. 당시 숭일학교 학생이었던 정두범은 교사인 최병준(崔丙俊)에게 미리 교부받은 독립선언서와 ‘경고아이천만동포(警告我二千萬同胞)’라는 경고문, 독립가(獨立歌) 등을 광주 시내의 시위군중에게 배포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0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