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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명성황후, 그는 누구인가? 25 대한 여론이 부정적으로 형성되었다. 백성은 황후가 여흥민씨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민씨들이 황후를 믿고 발호한다고 여겼다. 더욱이 중전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나머지 국고 를 낭비하는 인물로 비치고 있었다. 미신 같은 사교 에 빠져 전국의 용하다는 점장이들을 찾아다니고, 명산대천에 수만 냥의 거금을 써가며 기도를 드리면 서 돈을 낭비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황후가 무속 에 빠지게 된 것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순종이 병약 한 데 원인이 있었다. 순종은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 지 못했다. 어려서 천연두를 앓았고 까닭 없이 자주 신열이 올랐다. 옆구리 담증으로 고생한 적도 있었 다. 부인은 민씨(1882년 민태호의 딸과 결혼, 민씨는 1904년 33세로 사망)와 계비 윤씨(1906년 윤택영의 딸과 결혼) 두 명을 두었으나, 후사를 보지 못했다. 남성으로서의 생식기능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자에 대한 황후의 특별한 사랑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도 에 넘치면 비난을 받기 쉽다. 또한 권력의 최상위에 있을수록 언행을 삼가야 하는 법이다. 비록 황후와 관련된 소문이 과장된 풍문으로 새어 나온 면 이 있 었다고 할지라도, 백성이 등을 돌리는 지경까지 되 었다면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모성이 잘못 구현된 것 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민씨들의 핵심 인물로서 일 족을 관리하지 못한 허술함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왕실 자금을 구복(求福) 행위에 쏟아붓고, 다양한 서 양인들과 교유하며 국제정세를 파악한 일들이 설혹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처사였다 할지라도 경계하고 삼가는 바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황후의 국정 개입 황후는 정치 전면에 나서지는 않더라도 막후에서 여러 가지 정치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해 고종 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갑신정변 이 후 일본에 망명 가 있던 박영효가 갑오개혁이 진행 될 당시 일본의 도움을 받아 귀국하게 되자 그를 국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던 순종  명성황후 표준 영정(운현궁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