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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평안도 지역 3 · 1운동의 전개와 양상 25 출동하여 30여 명을 검거하고 예배당과 교구실의 집 회를 금지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평안북도의 3·1운동은 3월 2일부 터 평안북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3월 3일에는 의 주군과 선천군 지역 시위가 계속되었고, 3월 4일에 는 신의주 읍내시위, 용천군 양시시위, 3월 5일 기독 교인이 중심이 된 철산군 차련관 시위, 정주군 읍내 시위, 기독교도와 천도교도가 연합한 삭주군 삭주읍 시위, 천도교도들이 선도한 초산군 초산읍 시위, 3월 6일 기독교인들이 선도한 위원군 위원읍 시위, 3월 10일 천도교도들이 선도한 벽동군 벽동읍 시위, 후 창군 후창읍 시위, 3월 11일 구성군 남시 시위, 3월 20일 천도교도들이 주도한 창성읍 시위, 3월 31일 태천군 태천읍 시위, 4월 8일 강계읍 장날시위 등이 잇따랐다. 평안북도의 3·1운동은 그해 5월 말까지의 통계만 도 시위회수 211회, 시위참여자 수 338,400명, 사망 자 수 949명, 부상자 수 1,493명, 체포자 수 4,774명 에 이른다. 평양, 진남포, 안주에서 시작된 평안남도의 3 · 1운동 평양에서의 3·1운동 준비는 중국 상하이[上海]의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에 파송한 선우혁(鮮于爀)이 1919년 2월 9일 이승훈(李昇薰) 장로의 소개장을 가 지고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 길선주를 찾아 가면서부 터 태동하였다. 이 때 그 자리에 장대현교회 부목사 변린서, 평양 예수교서원 안세환도 동참했는데, 이 때부터 변린서 목사는 서문외교회 김선두 목사, 산 정현교회 강규찬 목사, 장대현교회 이덕환 장로, 윤 원삼(尹愿三) 장로, 산정현교회 김동원 장로, 도인 권, 김성택 목사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2월 12, 13일경 윤원삼, 황찬영(黃賛 永, 숭덕학교 교사), 김제현(金濟鉉), 곽권응(郭權膺, 숭덕학교 교사) 등이 예수교서원으로 안세환을 찾아가 도쿄[東京] 유학생 이 조선독립선언(2·8독립선언)을 발표했으므로 그것 을 성원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논의를 했다. 2월 15일 이승훈이 기차로 아침에 평양에 도착 한 뒤 기홀병원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서울 정동교 회를 사임하고 중국으로 떠나는 손정도 목사를 만나 평양 남산현교회 신홍식 목사를 소개받았다. 그 다 음날 이승훈은 기홀병원에서 신홍식, 길선주 목사를 만나 민족대표 참여를 확답받고, 저녁 기차로 상경 하였다. 2월 19일 신홍식 목사가 서울에 올라가 2월 20-21일 이승훈, 박희도, 정춘수, 이갑성, 오기선 등 기독교 진영 대표 모임에 참석하고 2월 22일 평양으 로 돌아왔다. 이후 신홍식 목사는 남산현교회 부목 사인 박석훈 목사와 함께 평양 감리교계의 만세운동 을 준비했다. 평양에서의 3·1운동은 장로교계와 감리교계, 천도 교계가 각각 별도로 준비하여 실행하였다. 1919년 3 월 1일 장로교계는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감리교계 는 남산현교회에서, 천도교계는 설암리 교구당에서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 시위에 합류하였 다. 장로교계는 3월 1일 오후 1시, 평양 장대현교회 의 종 소리를 신호로 교회 옆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평양의 장로교회 연합으로 1천여 명이 모여 광무황 제(고종)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봉도 식에 이은 독립선언식은 단상에 대형 태극기를 내걸 고, 당시 장로회 총회장이자 서문외교회를 담임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