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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희생과 통합 지향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 홍진 25 홍진은 자신을 희생하며 임시의정 원과 임시정부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1년 5월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임시의정원을 정비해나 갔다. 새로운 의원을 선출하고, 의정 원 조직의 결원을 충원해 나갔다. 또 한 대태평양외교후원회를 발족하고,  간사장을 맡아 태평양회의에 임시정 부의 외교 역량을 결집시키고자 했 다. 1922년 8월 법무총장에 선임되 고, 이듬해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갈등으로 번지는 와중 에도 서로의 희생을 통한 타협을 주 장했다. …홍진은 좌와 우 가릴 것 없 이 모든 세력이 통일을 이루어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했 다. 결국 독립을 위해 해야 할 것은 좌 우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희생’ 이 그 전제조건임을 밝 혔다.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희생’과  ‘통합’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담뱃갑과 성냥갑을 꼭 쥐고 상하이로 간 이유는? 1919년 4월 어느 날, 그는 동지와 함께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서둘 러 상하이(上海)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3 · 1운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 은 국내에서 한성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을 상하이에 알려야 했기 때 문이다. 담뱃갑과 성냥갑을 손에 꼭 쥐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뒤늦게 출발한 동지와 평양에서 만나 평안북도 용천의 교회에서 하룻밤을 지 낸 후 압록강에 다다랐다. 압록강에서 통나무배를 타고 강 건너 안둥(安東, 현재 단둥)에 도착하 였다. 미리 약속한 한 청년의 도움을 받아 중국인으로 변장을 했다. 콧 수염을 깎았고, 옷도 중국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다시 기차를 타 고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4월 20일 상하이에 다다랐다. 그의 손에는 아 직도 담뱃갑과 성냥갑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한성정부의 각 원(閣員) 명단과 약법(約法), 국민대회 취지서가 감추어져 있었다, “나라의 원수가 이미 평생의 한이 되고 말았으니, 모두의 적을 어 찌 죽은들 가까이 할 수 있으랴.…” (「渡鴨綠江」, 『독립신문』 제16호, 1919년 10월 2일) 압록강을 건너면서 그는 나라를 빼앗아간 일제와는 절대 가까이 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다짐하였다. 그리고는 본디 쓰던 이름을 새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의 이름은 이제 홍면희(洪冕憙)가 아닌 ‘홍진(洪鎭)’이었다. 검사에서 변호사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홍진은 1877년 8월 27일(음력) 지금의 서울 서소문에서 부친 홍재 식(洪在植)과 어머니 한수동(韓壽東) 사이에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후일 호를 ‘만오(晩悟) · 만호(晩湖)’라 하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지 만 홀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한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젊은 시절 홍진 은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약 1년 6개월의 근대 교육을 받고, 이듬해인 1904년 졸업하여 한성재판소에서 잠시 근무하였다. 이후 홍진은 검사와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06년 검사 선발 시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