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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3 · 1운동의 태동과 서울 3 · 1운동의 전개 25 3 · 1운동은 1918년 11월 27일 상하 이의 여운형이 당시 중국을 방문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비공식 특사인  찰스 크레인을 만나면서부터 태동되 었다. 여운형은 장덕수·조동호 등을  만나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급 히 만들고, 그 단체의 총무 여운형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 지원을 청원하 는 청원서를 파리평화회의에 내기로  했다. 1919년 2월 28일 천도교, 기 독교, 불교의 조직망을 통해 독립선 언서가 전국에 인편으로 전달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독립선언서를 수백 장  혹은 수천 장씩 받아서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이후 이 선언서 가 전달된 곳에서는 대부분 만세운동 이 일어났다. 독립선언서가 갖는 위 력은 대단했다. 서울은 3 · 1운동의 발 상지, 그리고 만세운동의 진원지로서 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3 · 1운동의 태동 3 · 1운동은 1918년 11월 27일 상하이(上海)의 여운형(呂運亨)이 당시 중국을 방문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비공식 특사인 찰스 크레인을 만나 면서부터 태동되었다. 당시 크레인은 상하이에서의 연설에서 “파리평 화회의는 진정한 세계평화를 가져올 것이며,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강 조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여운형은 크레인을 따로 만나 미국 이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고, 크레인은 한국대표가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되면 돕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에 고무된 여운형 은 장덕수(張德秀)·조동호(趙東祜) 등을 만나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 를 급히 만들고, 그 단체의 총무 여운형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 지원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파리평화회의에 내기로 했다. 또 여운형, 장덕수, 조 동호 등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는 한편, 국 내외에서 한국인들이 독립을 바란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여 파리로 파견되는 대표를 돕기로 했다. 이에 김규식을 파리로, 여운형을 블라디 보스토크로, 선우혁을 조선으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장덕수는 2월 3일경 도쿄(東京)에 도착하여 유학생 조소앙(趙素昻)을 만났다. 조소앙은 장덕수에게 도쿄유학생들은 이미 2월 8일에 독립선 언을 하기로 했다고 장덕수에게 전한다. 도쿄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에 일본의 신문을 통해 미국 뉴욕에서 약소민족동맹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앞으로 열릴 파리평화회의에서 구성될 국제연맹은 민족자결 주의 원칙을 완전히 인정하고, 약소민족도 이에 가입할 수 있어야 한다 고 결의한 것을 알았다. 또 유학생들은 미주에서 발간되는 국민회 기관 지 『신한민보』를 구해서 볼 수 있었는데, 1919년 1월 16일자 신문에는 국민회에서는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할 예정 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에 고무된 유학생들은 12월 29일 도쿄 간다(神田)에서 열린 유학 생들의 망년회와 1월 6일의 웅변대회에서 “이번 기회에 조선은 독립해 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유학생들은 독립의 의사를 일본 정부 및 각국 공사에게 표시하기로 하고, 10명의 위원을 선정하였다. 유학생 대 표들은 이광수와 백관수(白寬洙)에게 독립선언서와 민족대회소집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