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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을 만나 국권회복을 논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지사는 그후 구국방략의 일환으로 동지들과 함께 상덕태상회를 조직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하였으며 한미흥업회사를 설립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한편 지사는 안희제의 백산상회를 지원하기도 하고 대한광복회를 조직하는데 있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가장 중요한 책임자의 1인으로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지사는 청도청년회장에 추재되기도 하였으며 군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광업소를 설립한바 있었다. 1919년에는 대한광복회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8개월여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후 지사는 후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근대적 학교인 온명학원(후일의 매전국민학교)을 설립하였으며 만주와 중국의 이상룡 노백린 등과 연락을 취하여 의용단 군자금을 조달하고자 노력하던 중 체포되어 다시 3년 8개월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사는 석방된 후에도 단념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재기를 꾸준히 논의하였으며 그러던 중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광복회를 재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아 활동을 재개하였다.
지사는 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영남 유림의 대표가 되어 환국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으며 반공반탁운동을 전개 신탁반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또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문을 역임하였다.
이정희 지사는 조선 후기 외세가 조국을 침략하던 불우한 시기에 태어나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일생을 바쳐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후 조국은 광복이 되었으나 그가 원하던 근대적인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