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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완(高永完)은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일본에 유학중인 1939년 12월에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상흠(金相欽)·서영원(徐泳原)·윤주연(尹柱淵) 등이 중심 되어 조직한 항일결사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에 참가하여 동회의 전라도책임자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동회는 3·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 동안에 이들은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로 하고 동경유학생 등 해외유학생과도 연락을 맺어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냉천동약수터·연희전문학교 뒷산·벽제관 등 각지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기르는 한편 동지규합 및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동회의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동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동년 9월에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3월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