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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개요 김진훈(金鎭焄) 선생 (1924.8.9-1945.6.23) 경남 창원(昌原)사람이다. 동래중학교 재학 중 1940년에 양중모(梁仲模), 남기명(南基明), 김일규(金一圭)등과 함께 은사 허현(許鉉)의 지도를 받아 독서회를 조직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41년 겨울에는 회원 김일규의 집에서 회원들과 모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독서회를 강화하여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으로 개편하였다. 1942년 봄에 이들은 남기명의 집에서 차 회합을 갖고 강령을 정하는 한편 항일 투쟁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때 그는 행동반으로서 외교 관계의 일을 맡았다. 그는 당원들은 여러차례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행동방략을 협의하다가,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 행동을 개시하였으며, 당원간의 연락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로 취하도록 하였다. 1944년 8월 1일에 양중모의 집에 다시 모여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 분석하고 군사기밀 탐지, 일군탄약고 폭파, 군용열차 통과시 구포(龜浦) 다리 폭파 등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군에 입대한 후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지일회(紫一會), 순국당(殉國黨) 등과도 연락을 통하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려 했다. 특히 순국당은 1944년 5월 결성때부터 조선독립당원 이관수(李觀洙)가 그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내용, 조직 등이 거의 같았을 뿐 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 191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경에 탐지되어 동년 8월에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그 당원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피체 후 미결수로 부산형무소에서 보고를 치르던 중 일격의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1945년 5월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