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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으로 돌아오신 후 마침 원단을 당하여 옥중의 수천명이 모인 자리에서 선생은 소리높여 왜적의 만행을 성토하시고 나라 원수를 설치 못함이 원한이요 겨레는 협심하여 조국광복을 성취하는 것이 소원이로라고 경고하시니 만장은 비분강개의 눈물을 흘리었고 옥밖에서도 수백명 엿듣고 크게 감동한 바 있었나니라. 이로써 선생은 갖은 악형을 당하였으나 더욱 준열하게 적을 노매하신지라 저들도 마침내 백날가식이나, 단심난탈이라 하고 석방하기에 이르렀나니라. 임자 11월 6일 또 다시 대구옥에 투옥되셨고 무오 정월 12일에 삼차로 투옥되셨으니 이 때 법정에서 선생은 내 쌀로 내 술을 빚었을 뿐이라. 다만 너의 왕의 머리를 베어 내 술잔으로 만들지 못함이 한스럽다 하셨나니라. 이 때 선생은 이미 주금을 각오하셨는지 그 해 6월에 사자에게 사자 지제에는 반드시 융희연호를 쓰고 작진만두 만회국맥 여덟자로 청작구를 대신하라 하셨나니라. 이리하여 선생은 절식 8일만인 무오 7월 20일 77세로써 옥사하시니라. 사림은 조선의사의 명정으로 수양산 이웃에 장사하고 선생의 충의를 받들어 상의계를 만들었으며 광복후는 문집간행과 숭의재 창건이 있었고 국가에서는 건국공로상이 있었나니라. 선생은 강릉유씨로서 휘는 병헌 자는 주현 만송은 자호이니 칠곡 북삼면 상강리에 세거하시니라. 생각컨대 선생의 소지는 광복에 있었고 일체의 행동은 항적에 있었나니 위에 기록한 행적으로써도 이미 일관한 정신이 그러한 것임을 보겠거니와 유문을 상세히 보면 더욱 그 지행의 소재가 소연한 것이라 무릇 국가의 망극한 변을 당하여 일개 포의로서 돈세결신도 족하거늘 선생의 지행은 한갖 고절에 있지 않고 저사항적에 있었고 그 죽음도 한갖 탁세를 망각하자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항적을 하자는 것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