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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 9년 을사에 이른바 보호조약이 맺어짐에 선생은 도적이 방안에 들어와서 그 집을 보호하다니 듣도 보도 못한 노릇이라 하셨으니 선생의 항적은 실로 이때부터라 할지니라. 융희 4년 경술에 실국의 큰 변이 생긴지라 선생은 북망통곡하고 한동안 절식끝에 다시금 일어나 이미 구차히 살지도 않으려니와 또한 한갖 죽어버리기만도 않으련다 하고 이내 오적을 성죄하여 일본 내각과 총독부에 격하는 동시에 미 청 노 영 법 등 여러나라에 글을 보내어 왜적의 죄를 통격하시니라. 이에 왜졸은 갖은 유혹과 위협으로 나중에는 이른바 은사금으로 선생의 뜻을 꺾으려 하였건만 선생은 욕되다 하여 끝내 거절하시고 은수변파록을 지어 통척하시니라. 경술 가을에 왜정의 세금을 거부타가 신해 10월 마침내 총독부의 심문을 받으니 선생은 오랑캐들은 나를 죽일뿐이라 하고 목을 가리키면서 대갈하셨나니라. 그리하여 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