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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은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한반도의 남과 북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고, 미군이 남한을 통치하던 시기에 벌어졌다. 이 사건은 1947년 3.1절기념행사 때 경찰의 부분별한 발포로 6명이 희생되면서 시작됬다. 도님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경찰과 극우단체인 서북청년회의 탄압이 이어졌고 급기야 3명이 고문치사 당했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경찰지서를 습격하며 붕기했는데, 그 후 1954년 한라산이 개방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사건이 전개됬다. 이 기간에 인구의 10분의 1일 약 3만영이 희생되었다. 중문면 12개 마을도 모두 큰 희생을 치렀다. 무장대는 중문리 소재 경찰지서를 습격하며 면사무소를 불태웠고, 식량탈취 과정에서 일부 마을 주민을 살해하거나 집을 불태웠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군경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특히 갈취와 푹행을 일삼던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경찰과 군인으로 변신해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1948년 가을 소개령과 계엄령이 선포돼 중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초토화작전이 전개됬다. 해변마을도 예의가 아니었다. 토벌대는 걸핏하면 무장대 지원 혐의를 씌워 법적 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총살했다. 두려움에 떨던 청년들이 도망치면 남은 가족들은 도피자가족이라며 남녀노소 무차별 학살했다. 유족들은 연좌제로 장래가 막히고 온갖 치욕을 당하면서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50여년간 몸부림쳤다. 그 결과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됐고, 2003년 10월 15일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다. 노무현대통령은 보고서가 채택되자마자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