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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소년단 독립운동 일제의 한국지배가 기승을 부리던 1939년 이천 장호원제일심상소학교(현 장호원초등학교 전신) 학생들이 항일독립운동단체인 「독수리소년단(荒鷲少年團)」을 결성하였다. 단원들은 단장 박영순(당시 17세)을 위시하여 김순철, 이상진, 조태옥, 박기순(이상 15세), 박기하, 백운호, 오기환, 박승연(이상 14세), 곽태현(13세), 이상한, 이범상, 박정순(이상 12세), 김만식(11세) 등 어린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장차 독립군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워 단장과 조장을 두는 등 단체를 조직화했고, 매주 1~2회씩 박영순 단장 집에 모여 조선 역사와 위인 이야기를 학습하며 반일 감정과 민족의식을 키웠다. 야밤에는 공동묘지에서 병정놀이를 빙자한 담력 훈련 겸 체력단련을 했으며, 조직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밭을 개간하고 채소를 직접 경작하기도 하였다. 단체 결성 3년째인 1942년 2월 하순 무렵, 장호원읍 시내의 전봇대와 시내버스 창틀에 “일본은 패망하니 조선 민족은 그들에게 협조하지 말 것”과 “조선 민족 단결로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의 벽보를 붙였으며, 이 유인물을 전국 각지의 현직 군수들에게 우송하였다. 버스에 붙인 항일격문은 장호원 지역을 벗어나 서울 등 대도시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같은 마을 이○○ 밀고로 1942년 3월 초 단원 14명이 전원 체포되었다. 그들은 장호원주재소를 거쳐 이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갖가지의 모진 고문을 당하고 어린 단원들은 사흘 만에 풀려났으나 주범으로 간주된 단원들은 더욱 긴 기간 동안 취조를 받았고 각각 형사처분을 받았다. 단장인 박영순은 경성지검으로 이송되어 형을 선고받고 긴 세월 옥살이를 했다. 박승연 박기순 이상진 곽태현 등은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일찍 등지게 되었다. 10대 어린 소년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 사건은 높히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나, 해방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들의 애국행위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져갔다. 이에 이천의 독립운동 행적을 밝히고 독립투사들의 정신 선양을 목적으로 결성된 「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수년간 <독수리소년단>의 정신을 기리고자 노력해 왔으며, 그 결실로써 이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 참조 : 백운호독립투사 증언 및 기타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