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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진응 자는 경재 호는 직헌 본관은 전주이다. 1847년 음3월 17일 춘천부 남산외면 하방곡리(현 남산면 방곡리)에서 부친 이도빈과 백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나니 만응과 경응은 형제간이요 소응은 종제이다. 공은 조선조 선조대왕 제9왕자 경창군 단의 후예로 6대조 화평군 발이 경기도 광주에서 춘천으로 이주한 후 세거하였다. 화평온후한 품성을 지닌 공은 일찍이 화서 이항로의 고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에게 수학하여 화서학파의 척사구국운동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1894년 갑오왜란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사변 단발령 공포로 전국적인 항일의병이 봉기하자 1896년 1월 춘천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의병대장에 오른 습재 이소응은 당시 삭발하고 부임하는 춘천 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잡아들여 처형하는 등 을미의병가운데 가장 먼저 의세를 떨쳤으며 그 여세를 몰아 서울진격에 나섰다. 그러나 2월 3일 가평 벌업산(보납산) 전투에서 무기의 열세로 신익균과 전구현이 있는 관군에게 패배하여 춘천 약사현(현 약사동)으로 퇴거 유진하는 동시에 이소응은 포군을 보충하고자 공에게 의진을 위임하고 지평군수에게로 떠났다. 이러한 처지에서 의병대장이 된 공은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항일의병전을 계속하였으나 추격해오는 관군에게 몰리어 1896년 2월 8일 키(을미년 12월 25일) 락가현전투에서 격전 끝에 마침내 전사하니 이후 춘천의진은 이경응이 통솔하게 되었다. 이때 공의 시신은 우인 민영문이 수습하여 남산면 강촌리에 안장하였다가 2001년 5월 5일 증손들이 방곡리 선영에 천묘하였다. 공은 직헌 선생 유고 필사본을 남겼으며 국가에서는 국가에서는 국권수호를 위하여 항일의병투쟁에서 순국한 공의 공적을 기리어 1991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단기 4334년(서기 2001년) 5월 일 강원대사학과명예교수 족손 이구용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