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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매지(박인환)의병장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1907년부터 지리산일대에서 고광순, 김동신의병장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맹활약한 경남지역의 대표적인 항일 의병장이다. 특히 박매지는 권석도, 임봉구와 함께 500여명을 지휘하며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큰 타격을 가했다.
그러던 중 1909년 진주시 대평면전투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31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공훈록 :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고광순(高光洵) 의진과 김승지(金承旨) 의진에 참여하여 경남 하동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대한제국의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봉기는 동년 8월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계층도 유림, 농민, 포수, 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박인환은 고광순 의진에 참여해 활약하였다. 고광순은 1907년 1월 24일 고제량과 더불어 창평(昌平) 저산(猪山)에서 창의의 기치를 세우고 토적격왜(討賊擊倭)의 전술전략을 수립하고 각 처의 의진과 연락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고광순은 남원의 양한규(梁漢奎) 의진 등과 연합하여 화순·능주·창평·곡성·구례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공을 세웠으나 1907년 10월 11일(음력 9월 11일) 일본군의 기습으로 불행하게도 화개동 연곡사(燕谷寺)에서 전사하였다. 박인환은 고광순이 전사한 이후에는 김승지 의진에 가담하여 좌십인장(佐十人長)으로 활동하다가 1908년 4월부터 임봉구 의진에서 활동하였다. 임봉구 의진은 하동군 청암면(靑巖面)을 근거로 인근 각 면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박인환은 임봉구 의진에 참여하여 1908년 4월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 총기, 탄약 등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 및 순사의 합동수색대와 조우하여 접전을 벌였다. 또한 7월에는 하동군 외횡보면(外橫甫面) 역마내동(驛馬內洞)에서 일신일어학교(日新日語學校)를 습격하여 일본인 교사를 인솔해 온 정우철을 응징하고 교사(校舍)를 소각 전소시켰다. 이어 내횡보면 토덕동(土德洞)에 거주하는 일진회원(一進會員) 장재수를 처단 응징하는 등 일제 침략세력을 일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인환은 하동군 악양서면(岳陽西面) 신흥촌(新興村) 부근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가 탈출하였다. 그는 탈출 후에도 1909년 5월 권석도(權錫燾)·이학노(李學魯) 등과 경남 진주군 일대를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909년 7월 22일 일경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