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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예진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항일 투쟁의 명문인 고흥(高興) 고씨로서 임진왜란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예이다. 그의 일문은 녹천 고광순(鹿泉 高光洵)의 휘하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휘하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고예진은 그의 형 고석진(高石鎭) 고용진(高龍鎭)과 함께 면암의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은 오랫동안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으나 동지 규합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고예진과 고석진 그리고 고제만(高濟万) 등 청년들이 정산(定山)에서 면암에 호응하여 거사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배포하고 12월 충남 노성(魯城)에서 각지로부터 소모(召募)된 7백여 명과 함께 거의하였다. 한편 면암은 의거의 거점을 물색하던 중 문하생의 추천으로 알게 된 임병찬(林炳瓚)의 권유로 태인(泰仁)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講會)를 열어 태인 일대의 유림인사를 규합할 때 함께 거의하였다. 여기에 그의 형 고용진이 포수 30여명을 이끌고 참가하여 기세를 올려 주었다. 그 이후 고예진은 면암 휘하에서 정읍(井邑) 순창(淳昌) 곡성(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순창 귀암사(龜巖寺)에서 포진(布陣)하고 적과 접전하다가 크게 패하고 체포되어 전주옥(全州獄)에 투옥되었다가 12월 27일 석방되었다. 1914년에는 황제의 밀명에 의하여 독립의군부 서기관(獨立義軍府書記官)으로 임명되어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한 137인 중의 1인으로 서명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