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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25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을미사변(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을 다시 본다’ 여성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명성 황후는 국모의 자리에 걸맞게 이지적이며 냉철한 면 모를 지닌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 후 궁궐에서의 생활 고종은 15세의 나이로 한 살 위인 민왕후를 왕비 로 맞이하였다. 황후가 16세 되던 1866년(고종 3년) 3월이었다. 가례는 민씨가 왕비에 책봉된 이튿날인 21일에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인 잠저 (潛邸), 운현궁에서 치러졌다. 왕비 간택은 흥선대원 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천거가 결정적이었다. 부대부인 민씨의 남동생인 민승호가 황후의 양오라 버니로 입적하는 과정에서 대원군 집안과 황후가 자 연스럽게 가까워져 인연을 맺게 된 것으로 보인다. 황후가 1874년 순종 척(坧)을 낳기 전인 1868년 에 고종에게는 이미 영보당 이씨가 생산한 완화군 선(墡)이 있었다. 황후는 순종을 낳기 전에 1남 1녀 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고종과 황후의 관계는 처음에는 다소 서먹했지만, 황후에게는 매력 적인 요소가 많았다. 그녀는 성품이 단정하고 아름 다웠다. 궁중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를 지극정성으 로 모셔 황후에 대해 “효성스럽다”는 말이 떠나지 않을 정도였다. 일상생활과 접대 절차도 꼭 웃어른의 의 견대로 하였다. 해마다 음력으로 2월이 되면 북쪽 뜰 에서 직접 누에를 치고 햇과일을 거두어 선조께 제 사를 지내는 등 예의범절이 뛰어났다. 계속되는 출 산 실패와 영보당 이씨의 존재로 자칫 소원해지기 쉬운 남편과의 관계를 공경의 마음과 편안한 보좌로 회복시켜 나간 덕성스러운 여성이었다. 무속(巫俗)에 빠진 황후 밖에서 본 명성황후는 이지적이며 총명한 여성으 로 평가되었지만, 정작 백성에게는 부정부패의 원 흉으로 인식되었다.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의 와 중에는 여주로 피난을 해야 할 정도로 고달픈 한 때 를 보내기도 했다. 그 이면에는 민겸호, 민치상, 민영 익을 비롯한 여흥민씨 일가의 고속 승진에 대한 곱 지 않은 시선이 작용했을 것이다. 더불어 시기를 내 려오면서 민영주, 민형식, 민영준 등 친인척의 비리 와 탐학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여흥민씨에 1903년 11월 28일자 러시아 신문 『노보예 브레먀』에 실린 고종과 명성황후의 일러스트레이션 여주에 복원된 감고당의 솟을대문(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