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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25년 3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3 · 1운동의 지역적 전개 양상과 특징 ②’ 목사 이하 주동자 7인을 헌병대에 구속했다. 이날 시위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3월 2일 시위부터는 천도교측이 가세하여, 의주 남문 밖 광장에서 시작된 시위에 천도교인을 포함한 인근 지역 농민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날 오후에는 기독교인과 주민 3,0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30 명이 체포되었다. 3월 3일에는 의주 일대의 1,200여 명이 읍내로 집결하여 시위운동을 벌이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총검과 쇠갈고리로 진압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결사항쟁을 다짐하고 몇 개의 시위대를 조직 하여, 헌병대와 관공서로 몰려가 탄압에 항의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3월 4일에도 양실학교 학생 600여 명이 시위를 벌이고, 읍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3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선천에서의 3 · 1운동 준비는 선천북교회를 담임 하던 양전백(梁甸伯) 목사가 1919년 2월 13일 이승 훈 장로, 유여대 목사, 김병조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 로 참여하기로 결단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양전백 목 사와 함께 선천 3 · 1운동을 주동한 사람은 당시 신성 중학교 성경교사로 있던 홍성익(洪成益)이었다. 그는 선천남교회 장로였으며, 이승훈과는 평양 장로 회신 학교 동기였다. 그래서 이승훈은 그에게 선천 만세 시위의 준비를 부탁하였다. 홍성익은 자신이 출석하 던 교회 김석창 목사와 신성학교 동료 교사 김지웅, 양준명 등과 여러차례 준비 모임을 갖고, 신성학교 학생들의 준비는 김지웅에게 맡겼다. 3월 1일 오후 2시 학교의 종소리를 신호로 신성학 교 학생 100여 명과 보성여학교 학생 60여 명이 독 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만세를 부르고 행 진하여 남천동 시장에 이르자 일반 주민들이 가세하 여 1,000여 명이 넘게 모였다. 그러자 김지웅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과 경찰서가 있는 방향으로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에 당황한 일본 군경이 출동하여 저지하다가 발포 까지 하여 기수 강신혁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죽고, 교사 정상인과 학생 김하현 등이 부상을 입었다. 그 리고 현장에서 교사 학생 등 50~60명이 검거되었 다. 3월 3일에도 기독교인은 선천북교회에서, 천도 교인은 선천교구실에서 국장 봉도식을 갖고, 만세시 위에 나서 1,5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유여대(1878~1937) 양전백(1869~1933)  김병조(1877~1948) 이승훈(1864~1930)  (이상 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