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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에 덕산보통학교에서 수학중 익년인 1919년 3.1운동을 맞게되자 항일시위에 가담 학교를 자퇴하였다. 14세에 오치서숙에서 매곡 성주록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사서삼경과 시문을 익히더니 17세에 '명추(鳴椎)', '옥타(玉唾)'등 한시집을 내고 신학문에도 접하였다. 15세에 정주 배용순과 혼인하여 아들 종을 두었다. 19세에 오치서숙을 마친뒤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야학을 열어 무산자제들의 교육에 앞장서는 한편 동지와 더불어 월진회 수암체육회 한계강매조압등을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9년에는 다시 부흥원을 세우고 농민독본을 착술하여 모든 약소민족의 해방과 자유평등을 외쳤으며 월례 강연회를 열어 애국사상의 함양과 독립정신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윤의사는 1930년 3월 6일 23세의 나이로 세에 덕산보통학교에서 수학중 익년인 1919년 3.1운동을 맞게되자 항일시위에 가담 학교를 자퇴하였다. 14세에 오치서숙에서 매곡 성주록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사서삼경과 시문을 익히더니 17세에 '명추(鳴椎)', '옥타(玉唾)'등 한시집을 내고 신학문에도 접하였다. 15세에 정주 배용순과 혼인하여 아들 종을 두었다.세에 덕산보통학교에서 수학중 익년인 1919년 3.1운동을 맞게되자 항일시위에 가담 학교를 자퇴하였다. 14세에 오치서숙에서 매곡 성주록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사서삼경과 시문을 익히더니 17세에 '명추(鳴椎)', '옥타(玉唾)'등 한시집을 내고 신학문에도 접하였다. 15세에 정주 배용순과 혼인하여 아들 종을 두었다. 19세에 오치서숙을 마친뒤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야학을 열어 무산자제들의 교육에 앞장서는 한편 동지와 더불어 월진회 수암체육회 한계강매조합등을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9년에는 다시 부흥원을 세우고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모든 약소민족의 해방과 자유 평등을 외쳤으며 월례강연회를 열어 애국사상의 함양과 독립정신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윤의사는 1930년 3월 6일 23세의 나이로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유서를 써놓고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와 청도를 거쳐 익년 5월 상해에 도착한 윤의사는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 백범 김구선생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보게 되었다. 피혁회사원과 채소상을 전전하던중 일본의 일황생일 축전겸 전승축하준비 보도가 나오자 윤의사는 이를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기뻐하였다. 곧 상해 거류단사무실에서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라고 엄숙히 선서하였다. 윤의사는 거사 2일전 홍구공원을 답사한후 유촉시를 썼다. 처는 한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왕손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될 청는 한 방초여 면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광산에도 다겨가오 다정한 방초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일성으로 맹세하세 마침내 윤의사는 중국 19로군 정보국장 겸 병기부 주임인 대한인 김홍일이 주도한 폭탄을 김구선생으로 부터 전달받아 거사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자 너희와 우리는 역사와 풍속과 언어가 다른 민족이다. 너희가 우리를 통치한다는것은 극동의 평화를 파괴하고 인류의 자유를 말살하는 행동이 다라고 힐책했다. 형장으로 떠가기 직전 유언이 없느냐는 형무소 소장의 말에 남아로서 당연히 할일을 다했으니 만족하게 느낄따름이다 아직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멀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