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page


24page

의 의병단과 연합전선을 펴기도 하였지만 주체는 유중화 등 9인 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일대의 의군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비봉면 소농리 불당동에 병기제작소를 두고 고산 익산 여산 용담 진안과 멀리 진산 금산 연산에 이르기까지 활동을 넓혀 상당한 적의 군마를 격살하는 전적을 올렸다. 한편 자체내의 비행을 숙청하고 친일파 일진회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군자금은 백체의 조달과 뜻있는 지방의 부호 몇사람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9의사의 항일 활동은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4년동안 실전이 계속되었으며 국치이후 국내의 의병활동이 지식된 때에도 그들은 행적을 숨겨가면서 항일의 항일운동을 계속하여 기회를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이들의 잠재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경술 10월에 총책을 맡은 유중화를 체포하고 국치후 6년 8의사를 일시에 체포하였다. 이때의 구형죄목은 강도범이었다. 그러나 앞서 지방 부호들로부터 의연금을 받은 것을 항일운동의 강도행위며 내란죄에 해당하되 경술합방조약에 따른 사면령이 적용됨을 판시하였다. 그래서 간교한 부일배와 결탁하여 터무니없이 또다른 행위를 날조하여 이에 얽어씌웠다. 앞서 금마헌병대에 피체된 유중화는 무서운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혀를 깨물어 저들의 비행을 질책하고 즉석에서 총살을 당하는 영웅적인 순국을 하였다. 나머지 8의사도 최저 10년에서 15년의 형을 받았다. 유현석은 탈옥하여 변성명하고 은피하였다. 유태석은 복역 중에 옥사하고 그 외 의사들은 출옥후에 형독으로 수년을 넘기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9의사의 대부분이 가파 신은 하고 절손까지 되는 참상에 이르렀다. 또 유종화의 생질 이유종은 옥사하고 이태종은 출옥 귀가중에 돌아갈 곳이 없어 도중에서 할복자결하였다. 아! 이들 의사의 장함이여. 이들은 신분도 지위도 명예도 공훈도 불고하였다. 오직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위국단성의 세훈을 이행할 분이었다. 여기 고흥 유씨 일문 중 9의사의 출현은 임란 의사 고흥봉 일문에서 9의사가 출현함과 같다. 이야말로 일문중의 자랑이며 이 고장 이 나라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청사에 빛나는 의거요 민족도의의 사표며 호국의 성령이다. 이들이 십수년의 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이 운동에 관계되는 비밀문서는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이의 장거는 이 지방 사람들에게 등불처럼 비치고 있다. 이에 지방 고노들의 증언을 듣고 당시 9의사와 관계된 독립투사들의 행적을 더듬어 이를 엮어 비에 부쳐 길이 공적을 기념코자 하는 바이다. 단기 4315년 임술 5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