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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이준구를 비롯한 제유와 동모 창의하여 항일독립운동사의 서장을 장식하였다. 익년 단오절에 기계 인비벌에서 경주의진을 결성하니 때마침 남한산성에서 남하한 김하락 장군과 합세하고 공은 휘하에서 참모장으로 수훈을 세웠다. 의군의 행진은 안강을 거쳐 경주 황성숲에 주둔 성중 군민에게 토왜구국의 대의로 설유하여 내응하게 하고 입성하니 군민들이 쌍수를 들고 나와 맞이하였다. 입성한 3일 후 왜군과 야합한 관군을 맞아 군민이 동심육력으로 선방 3일간의 혈전 끝에 비록 퇴군은 했지마는 이 일전은 경주의 자랑이요, 민족정기의 표상으로 길이 청사에 빛날 것이다. 5월 1일에 의진은 경주성에서 후퇴 동해안으로 북상하던 중 공은 소모장으로 증원군을 이끌고 달성(현 내단동)에서 기다리다가 후퇴하는 주력부대를 도우니 다시 전군의 사기가 올라 신광 흥해 영덕을 공략, 25일에 공은 참모장 장상홍 이상태 등과 더불어 청하에 진주하여 군정을 폈다. 6월 3일 영덕 오십천에서 신식장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정예와 회전할새 의군은 화승총으로 맞서니 어찌 이 강적을 감당할 수 있으랴. 4일에 끝내 대장군 김하락이 장렬하게 전사하자 이어 조정에서 선유사로 하여금 의군의 해산을 종용하니 의군은 해체되고 공은 귀향, 후일을 기약하며 인재양성을 기임으로 삼았다. 구봉정에서 서당을 열어 후진에게 조국광복의 민족혼을 진작하는데 여생을 바치다가 1919년 3월 21일 서거하니 구천산 해좌에 배위와 함께 합폄하였다. 근 일세기간이나 의적이 인멸되어 오다가 근래 여러 문헌에 의하여 그 의적이 소상하게 발천됨에 따라 1990년 8월 14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당시에 공을 비롯한 경주의진이 출진하던 그 길목이며 공의 유촉이 완연한 이곳에 이 비를 세움은 백일과 더불어 빛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