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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 참가하여 열열한 시위운동을 하며 우리 민족의 기백을 과시하였고 이 운동을 지방에 확산시키기 위하여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를 갖이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상수 형에게 상경 경위를 말하고 거사할 것을 합의하여 태극기를 만든 후 1919년 3월 8일 상수 형과 같이 삽재고개에 나아가 부역 나온 여러 부락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열열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후 여러날 학당의 생도들과 만은 태극기를 만든 후 1919년 3월 16일 유성 장날을 맞아 대형 태극기를 장안에 세우고 모여든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국민회보를 나누어주고 상수 형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낭독케한 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니 군중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늘어나고 만세소리는 유성 장안을 뒤덮으니 당황한 일본경찰이 대전헌병대의 응원을 받아 무자비한 총칼로서 진압을 하니 최일복은 전사하고 김성칠은 중상을 입었으며 이를 주동한 선생과 상수 형은 체포되어 대전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후 공주지방법원으로 넘겨 4월 9일 2년 징역의 선고를 받었으나 상고하여 5월 2일 서울 복심법원으로부터 1년 2개월의 확정 판결을 받고 1920년 5월까지 옥고를 치루었다. 석방된 후에도 고문으로 상한 몸이 회복되지 않어 많은 고생을 하시다가 1930년 12월 7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정부에서는 1983년 8월 31일 선생에게 건국공로포상을 드렸으며 선생의 불타는 애국심을 길이 간직하며 가신 님의 명복을 빌고자 여기 추모비를 세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