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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봉구 의병장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1907년부터 지리산 일대에서 박매지의병장과 함께 청년 500여명을 규합하여 의병대를 독자적으로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펼쳤다. 특히 그는 1908년 7월 24일 양보면에 소재한 일어학교를 방화 전소시키고 일진회원 다수를 처단했다. 그러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하동 경찰서 유치장에서 고문으로 28세의 나이에 옥사했다.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공훈록 :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경남 하동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대한제국의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봉기는 동년 8월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계층도 유림, 농민, 포수, 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임봉구는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1908년경 경남 하동에서 분연히 궐기하여 의병진을 결성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장으로 군사들을 이끌고 하동군 청암면(靑巖面)을 근거로 인근 각면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4월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 휘하 군사들로 하여금 총기, 탄약 등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 및 순사의 합동수색대와 조우하여 접전을 벌였다. 또한 7월에는 하동군 외횡보면(外橫甫面) 역마내동(驛馬內洞)에서 일신일어학교(日新日語學校)를 습격하여 일본인 교사를 인솔해 온 정우철을 응징하고 교사(校舍)를 소각 전소시켰다. 이어 내횡보면 토덕동(土德洞)에 거주하는 일진회원(一進會員) 장재수를 처단 응징하는 등 일제 침략세력을 일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7월말 청암면 상리동에 은신 중 일경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으로 하동주재소 유치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